“당신은 다이아몬드이고, 남편은 태양불이에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하면 당신은 더 빛날 겁니다.”
철학관에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신기했다. 꼭 믿어서라기보다, 그 말이 내 삶과 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는 불빛을 받아야 반짝인다. 돌아보면 남편이라는 태양이 있었기에 내가 조금 더 빛날 수 있었다. 공부를 이어가고, 원장으로 일하며, 글을 쓰고, 세 아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은 건, 부모의 기운만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기질이 나를 키워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늘 남편의 묵묵한 태양빛이 함께했다.
명리학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는 참 많은것을 느낀다.
아이들의 기운을 살펴보며 나는 늘 ‘겨울의 물, 가을의 바람’ 같은 계절의 흐름 속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일간(日干), 즉 아이의 본질을 상징하는 글자를 들여다보니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큰아들은 큰나무(甲木), 둘째는 태양(丙火), 셋째는 바위(庚金). 환경의 기운이 계절 즉 태어난 계절 이라면, 일간은 아이 그 자체였다. 같은 아이를 바라보아도 시선에 따라 다른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맞느냐가 아니라, 그 기운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느냐였다.
큰아들은 갑목(甲木), 큰나무다. 자기 길을 곧게 가려는 힘이 강했고, 작은 실패에도 쉽게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성급한 불처럼 “괜찮아!”라며 다그쳤지만, 나무는 서두른다고 크지 않는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큰아들을 통해 나는 기다림을 배웠다.
그리고 아빠의 태양불은 그 나무에 햇살을 비추어 주었다. 아이가 흔들릴 때도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는 아빠의 말은 나무를 다시 똑바로 세워주는 빛이었다.
둘째는 병화(丙火), 태양이다. 밝게 웃으며 모두를 비추었지만, 쉽게 지치기도 했다. 무대에 서기를 좋아하면서도 작은 실패에 금세 의기소침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아이가 빛나려면, 때로는 그 빛을 덮어주는 그늘이 필요하다는 것을. 둘째를 통해 나는 빛을 받아주는 자리의 소중함을 배웠다.
아빠는 둘째와 닮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둘째가 넘어져도 “괜찮다”며 웃어 주는 아빠의 모습은 아이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같은 태양끼리 통하는 힘이었다.
셋째는 경금(庚金), 큰 바위다. 단단하고 솔직했지만 아직은 거친 원석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꼭 했고, 싫은 건 단호히 거절했다.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바위는 시간이 지나야 다듬어진다. 셋째를 통해 나는 성장은 강요가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준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아빠의 존재는 그 바위를 더 단단하게 지켜 주었다. 아빠의 엄격한 한마디, 무심해 보이지만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셋째에게 “세상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신금(辛金), 다이아몬드이고, 남편은 병화(丙火), 태양불이다. 다이아몬드는 태양을 만나야 빛난다. 불같이 성급한 내가 지쳐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곁에서 묵묵히 비춰 준 남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나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흘러갔다. 나무에게는 햇살이, 또 다른 태양에게는 격려가, 바위에게는 단단한 그림자가 되어 주었다.
큰나무 같은 큰아들을 통해 나는 기다림을, 태양 같은 둘째를 통해 따뜻한 그늘을, 바위 같은 셋째를 통해 시간의 힘을 배웠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태양 덕분에 다이아몬드 같은 나 자신도 조금 더 빛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부모가 아이에게 길러지는 일이었다. 서로 다른 기질과 빛깔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며, 결국 우리 가족만의 조화를 만들어 왔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곧 부모도 함께 자란다는 아름다운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