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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며, 광장을 지나며

by Balbi

동네 지인들과 2주마다 만나는 모임이 있다.

세 명이 모여 만든, 벽돌책을 함께 읽는 작은 독서모임이다.


처음 모임을 제안할 때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라는 벽돌책을 함께 읽어보자는 취지였다. 2주마다 만나기로 했지만, 각자의 바쁜 일정에 따라 종종 미뤄지기도 했다. 결국 이 한 권을 완독하는 데에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을 통과한 우리는, 잠시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조금은 가벼운 세계사 책 두 권을 함께 읽었다. 그렇게 천천히 마음을 채워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벽돌책으로 돌아가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우리에게 벽돌책이란,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인문학 서적을 뜻한다.


1. 총,균,최

2. 코스모스

3. 이기적 유전자


우리는 이 세 권을 리스트에 올려두고, 어떤 책으로 시작할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결국 ‘총,균,쇠’를 읽기로 결정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각자 책을 구입했고, 정해진 분량을 나눠 읽기 시작했다. 두 번의 모임이 지나갔다. 처음엔 진도가 나가지 않아 힘들 것 같다는 예상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책은 잘 읽혔다.


다만, 책의 내용은 이름값에 비해 의외로 단순한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풀어놓은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모두의 의견. 완독을 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초반부를 달리고 있는 지금은 그런 생각이 강하다.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생각은 완독 후에 작성하는 것으로 하겠다.)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의 대화는 종종 샛길로 빠진다. 책의 주제에서 파생되어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로, 경제와 사회 이야기로, 그리고 자주 정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주제는 정치다. 비상계엄 이전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두 친구에게 나는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우리 셋은 투명했고, 정치적 성향도 비슷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탄핵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탄핵’으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인간관계를 맺으며 정치 성향으로 사람을 가르지는 않았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고 믿었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정국만큼은 달랐다.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지지를 드러내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팩트 체크 없이 극우 주장을 그대로 퍼다 나르고, 극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시상황도 아닌 평온한 일상에 비상계엄을 터트리고, 군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고,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본 사람에게 극우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절대왕정의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을 조선의 왕처럼 받들고 싶어하는 걸까?

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한 채, 누군가가 이끌어주어야만 안정된 삶이라 느끼는 걸까?


그저 말하고 싶다.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지난 주말, 탄핵 선고 전 마지막 주말이 되기를 바라며 집회에 다녀왔다.

하지만 목요일인 오늘까지도 헌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실망스럽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오래 걸릴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돌아오는 토요일, 아들은 낙원상가로 악기를 보러 간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잘 다녀와” 한마디로 끝났을 이야기였지만 말이 길어졌다.


“지난주에 우리 집회 다녀왔는데, 낙원상가 앞으로 행진도 했어. 그 일대 분위기가 예전이랑 좀 달라.

그러니까 갈 거면 오전에 다녀오고, 1시 전엔 집에 와야 해.”

“좀 늦게 가려고 했는데…”

“지난주까지는 평화 시위였지만, 앞으로는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 위험할 수도 있어.”


평범한 국민 모두가 일상에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 현실.

이게 과연 정상인가?

나는 대통령이라는 존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본인이 능력이 없다면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각 분야의 책임을 맡기고, 국가 안보에 집중해 국민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일상을 뒤흔들고, 사람들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그 무책임함과 폭력성은, 일상을 잃은 우리 모두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제발, 빠른 시일 내에 탄핵 인용이 이뤄지기를. 그 장면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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