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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혁 Jun 17. 2024

살아있는 게 궁금한 놈

살아있을 만 하긴 한 사건만 일어남

내 인생은 유난스러웠던 이유일까 덤벙댔었던 이유인가 다쳤던 적이 많았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더욱더 정도가 심했던 것 같다. 가벼운 찰과상은 없으면 내가 아니었고 늘 핏자국에 덴 자국까지 가끔 심심하다 싶으면 뼈에 금이 가서 깁스를 하고 다니곤 했다. 하루에 꼭 한 번 들었었던 이야기가 넌 얌전한데 어디서 그렇게 다치고 다니니였었다.


하도 많이 다치다 보니 크게 다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얼굴에 줄새기기였다. 많이 희미해졌지만 내 얼굴 왼쪽 광대즈음에는 상당히 긴 흉터가 하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그 시절 누구든 그렇듯이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했었고 나는 특히나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기에 복도에서도 친구들과 내기를 하며 뛰어다녔다. 그날도 나름 호각인 친구와 함께 달리기 내기를 하였고 쉬는 시간이라 북적이는 복도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긴 복도 속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대쪽에서도 한 친구가 달려왔었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가려서 그 친구를 미처 보지 못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둘의 충돌, 우리는 그대로 땅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내가 본 처음 광경은 땅바닥에서 입을 잡고 구르고 있는 반대쪽에서 달려온 친구. 많이 아파 보여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 친구를 걱정했다. 그런데 왜 인지 주변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다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뭐 별 아프지도 않은데 왜 나를 쳐다보나 싶었다. 그때 한 친구가 기겁하면서 이야기하기를


"너.. 너 왼쪽 뺨.."

"왜 뭐가?"


무의식 중에 내 왼쪽 뺨을 더듬으려는 찰나 달려오신 선생님이 얼른 나를 말렸다. 나는 그렇게 보건실로 끌려갔고 보건실에서 본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측했다. 벌어진 살과 그 위로 철철 흐르는 붉은 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는 닦을 새 없이 구급차에 실려갔고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을 시작했다. 안쪽 얇은 근육까지 찢어져 무려 72 바늘은 꿰맨 수술은 다행히도 무사히 끝났지만 흉터가 크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어렸던 나는 크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모님들은 나를 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크게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혼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흉터라는 큰 후유증을 남긴 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거의 바로 두 번째 사건이 터졌다. 하교 시간 나는 집에 갈 생각에 신이 나서 친구와 함께 신발을 갈아 신고 바로 뛰쳐나갔다. 하필 또 그때 학교 안에 일이 있어 주차를 하려던 선생님의 차가 튀어나와 나와 부딪혔다. 학교 안이였기에 서행이야 하고 있었다마는 내 조그마한 다리는 바퀴에 딸려 들어가기에 충분했고 딸려 들어간 내 다리뼈는 아주 가볍게 두 동강 나버렸다. 이번에도 그리 아프지 않아 멍하니 운전석의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만 있을 뿐 다른 행위는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난리가 났다. 운전석에 있던 선생님이 뛰쳐나와 얼른 구급차를 부르고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도 다 나와서 나의 상태를 살폈다 희한하게도 아프지 않았고 덕분에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두 번 본 선생님들은 이 놈이 미쳤나 싶었을 것이다. 다치기는 이렇게 다치면서 태평스럽게 주위나 구경하고 있는 놈이라니 기가 찼을 것이다. 당황한 선생님들은 그래도 다리 상태가 심하게 휘어져 있기에 부목을 대줬고 또 한 번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선택지가 두 가지 있었는데 깁스를 하는 것과 철심을 박아 넣는 것 중에 골랐어야 했다. 당연히 철심은 피부를 찢고 넣어야 했기에 깁스를 해서 자연적으로 뼈가 붙는 것을 선택했고 이런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큰 수술이야 할 건 없었고 두 동강 난 다리뼈만 맞추면 되는 상황이었다. 설명을 들은 부모님은 그나마 안심했다. 나 또한 그나마 안심을 하고 뼈를 맞추러 들어갔다.


안심을 하면 안 됐었다. 마취 따위는 없었다. 나름 5분 안에 끝나기 때문에 마취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내 입에 재갈을 물렸다. 조선 시대 고문을 받는 사람이 된 것처럼 재갈을 무니 곧바로 의사 선생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나는 인생 최대의 고통을 느꼈고 비명을 지르다 못해 악을 쓰고 있었다. 평생 안 지나갈 것 같은 5분가량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저번에 흘리지 않은 눈물까지 다 흘리고 깁스를 하러 갔다.


종아리 뼈만 부러져서 반깁스를 한 채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으며 인고의 시간 3개월을 보낸 뒤 갑스를 풀었다. 젓가락으로 긁었던 다리를 직접 긁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고 절뚝이지만 목발 없이 다닐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에 안주하지 못한 난 또 사고를 치러 나갔다. 아직까지 완전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하면서 방방을 타러 나간 것이다. 트램펄린 그리고 봉봉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을, 사실 그전에도 한두 번 타고 다녀서 별일 없겠거니 하며 타러 나갔는데 이게 웬 걸 친구들과 방방 위에서 고무공으로 축구를 하다 다른 친구의 무릎에 내 관절 부분이 강하게 부딪힌 것이다. 처음에는 부러졌을 거라 상상도 하지 않았다. 엎어져 있다 걷지 못해 친구들에게 부축해서 나올 때도 부러졌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부러지지 않았어야 했다. 이제 깁스 푼 지 1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만약 부러졌다면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걸을 수 있는 상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부모님을 부르게 되었다.


부모님과 병원을 함께 가는 길 부모님은 꾸짖을 줄 알았지만 비교적 조용히 병원으로 갔고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역시 부러진 것으로 판명이 났다. 같은 다리를 부러트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철심을 박을 뻔했지만 천만다행이게도 종아리가 아닌 무릎 조금 위 쪽이 부러져 통깁스를 하는 것으로 치료를 하기로 했다. 뼈를 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이번엔 그냥 똑 부러진 것이기에 그러한 과정은 필요가 없었다.


남은 것은 부모님의 꾸지람이었는데 이번에는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갔었다. 단지 지금까지도 통금이 있다는 것 빼고는..


다사다난한 병원 생활과 여러 흉터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생각한 것은 몸이 아픈건 누구나 알다시피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건강하게 최고인 것 같다. 또한 내가 아프면 나 혼자 아픈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아프게 되고 특히 부모님은 그 누구보다 마음이 찢어지신다. 어린 시절의 나보다 성격이 180도 달라져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이 다치는 경우가 더 적은 게 이러한 경험 속에서 나오는 무의식 중에 조심하는 행동 때문이 아닐까.


무튼 여러분들도 몸 건강히 너무 무리하는 일 없이 살길 바란다. 뭐가 잘되고 행복하든 아프면 결국은 불행해지기 마련이니. 여러분은 건강하면서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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