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안다. 어렸을 적 아이들이 얼마나 질문이 많은지 말이다. 아이의 눈에는 모든 게 처음이니 그럴 법도 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하는 아이들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다. ‘왜요? 왜요?’를 연발하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묻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세로,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두 아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가끔씩 깜짝 놀란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아이들은 또렷이 기억한다. 비단 노화로 인한 기억력 저하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질문한 자와 대답한 자의 ‘기억의 유효기간’이 다른 것에 기인한다.
호기심의 주체인 아이들은 마음을 열고, 질문을 통해 얻어낸 답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 기억은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사고 과정 자체의 일부가 된다. 그럼으로써 십수 년, 수십 년이 지난 시간까지도 기억의 장면으로 남긴다. 아이들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아이는 훌쩍 자라 성인이 되고,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한다. 아이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대리로 승진을 하고 과장, 부장으로 승진한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은 늘어가고 몸은 점점 굳어간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몸이 굳어가며 생각도 굳어간다. 마음을 활짝 열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지적 호기심을 한껏 발산하던 아이는 이제 없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새겨 넣은 주름을 훈장 삼아, 우월감을 드러내는 어른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어른의 우월감은 새로운 생각과 도전을 단절한다. 익숙해진 삶에 변화를 일으킬 그 어떤 호기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만의 성을 공고히 쌓아 나간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들수록 투자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다.
이제부터 제대로 ‘돈 공부를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면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는 일이 먼저다. 직책이 높고, 연봉이 많다고 자산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비례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직책이 높을수록 자신이 쌓은 성(城)의 문을 여는 일이 힘들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개방해야 한다. 그 문으로 어떤 것이든 들락날락하도록 두어야 한다. 오고 가는 트래픽 사이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문이 이미 활짝 열려있는 아이들이 투자를 더 잘할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사리분별이 미숙한 아이들은 리스크 관리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고 이 자리까지 온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없다. 지혜와 지식을 갖춘 어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생각을 바꾼다면 미숙한 아이들보다 돈 공부를 더 잘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말수는 줄어들고 고집은 늘어간다. 그러나 기회는 언제나 대중과 반대로 가는 길목에서 찾아온다. 나이가 들더라도 고집은 내려놓고, 배움에 있어서 마음의 문은 열어야 한다.
아이들이 가진 호기심으로 세상을 대해보자. 스스로 정해놓은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풀어보자. 새로운 영향력을 받아들여 내가 가진 기존의 신념에 버무려보자. 그래야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상한 사람들을 잘 걸러낼 수 있다.
투자 시장은 결코 우리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투자 공부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투자 공부를 통해 나 자신을 독립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투자 공부를 시작하자.
돈 공부에 늦은 나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