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불멸하기 때문에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흙, 혹은 나무, 우주의 별이 되어 어딘가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원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대부분의 시간은 '죽음'의 상태로 지내다가 '삶'의 상태로 지내는 것은 원자가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체로 존재하게 되는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 물리학자 김상욱 -
어느 날 서평에 인용한 문구인데,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이 문장을 꺼내어 음미한다. 조용한 환경에서 아주 천천히 호흡하며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성과와 성장만이 대우받는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즐겨보는 김창옥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례지도사 형제의 사연을 보았다. 사람들은 장의사라는 직업을 여전히 천대하고, 시체 닦는 그들과는 귀신이 들린다며 악수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담담하게 말하는 두 형제의 옆에 앉은 엄마의 표정이 어둡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는데, 엄마는 어쩐지 주눅 들고 죄인이 된 듯한 모습이다.
이어지는 김창옥 교수의 위로가 와닿았다. 장례 지도사를 천대하는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근원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섭리다.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고인의 마지막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낼 때, 그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들을 대신해주는 분들이다. 그러니 이 분들은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 뒤에 두 형제들에게 악수를 권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김창옥 교수는 한마디 덧붙인다.
‘제가 갱년기에 들어선 이후로 손에 열이 많아요.’
손을 잡아 주었을 때 형제의 마음은 어땠을까? 또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을 어땠을까? 이 장면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경건한 마음이 들 때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저녁 운동을 나갔다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살해를 당한 여성의 뉴스를 접했다. 참담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런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처럼 죽음은 예고가 없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나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야 하고 예외는 없다.
건강하던 장인이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지구별을 떠났다. 막냇사위인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기에 장인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육아휴직과 퇴사를 결정하게 된 것도, 장인어른의 죽음이 한몫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각은 오만이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생각마저도 오만일지 모른다. 더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참 어렵다.
죽음을 기억하자고 다짐하면서도, '삶'의 윤택을 더 추구한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과연 얼마를 더 모으면 행복해질까?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늘 부족하고 쫓기는 마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부'를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좋아도 너무 들뜨지 않고, 싫어도 너무 가라앉지 않아야 평온한 삶이 펼쳐진다. 평온한 삶이 기반이 되어야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삶을 누리고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되, 그 시간이 점점 끝나간다고 슬퍼할 게 아니다.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 죽음으로 옮겨가는 것이라 여기면 그만이다. 이것이 바로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돈의 크기가 커지는 것과 행복의 빈도가 늘어나는 것이 결코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