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香)에 관해서는 무지하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중학생 시절쯤일까? 홍보용으로 받은 휴대용 티슈에 밴 그 향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향에 빠져들었다.
쟁취하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그때도 알았을까? 애써 향(香)의 이름을 파헤쳐 내 옆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향(香)과의 재회는 고된 삶에 펼쳐질 우발적 설렘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몇 년에 한 번꼴로 그 향(香)과 재회했다. 길을 가다가 모르는 여성이 품은 그 향(香)과 조우할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만성 비염으로 이제는 완전히 퇴화된 줄 알았던 부비동이 급격하게 확장되는 기분이다.
향(香)이 길을 잃고 내 앞에 서서 헤매었으면 좋으련만, 희미하게 남은 향마저 재빨리 쓸어내는 겨울바람이 야속하다.
'안녕, 잘 가, 우리의 재회가 그리 길어지지 않기를...'
마흔두 해 동안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 호감 가는 사람이 있었으나 끝내 마음을 전하지는 않았다. 움켜쥐려다 놓치는 것보다는 바라보며 오래 머무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친절한 목소리와 따스한 눈빛은 나의 몇 달 치 에너지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축복했다. 두둑한 축의금을 끝으로 내 마음속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람들은 나를 '모태 솔로'로 정의한다.
나는 이 단어가 못마땅하다. 서운함이 없으니 불만이 없고, 소유욕이 없으니 평온할 수 있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하의 의미를 내포한 이 단어가 싫다.
사랑의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나무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한다. 나는 바다를 사랑하고, 시(詩)를 사랑한다. 그것들과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들. 내 기준에서는 그들이야말로 모태 솔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거리를 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구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함께 하며 즐거워하지만, 서로를 혼자 있게 한다. 현악기가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저마다 혼자이듯이.
한 사람에게만 쏟는 구속된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카사노바.
중고 거래를 위해 당근 마켓 앱을 켰다. 동네 생활 코너에 '시(詩) 읽는 모임'이 눈에 들어온다. 매주 토요일 10명 남짓 모여 자작시를 합평하거나 읽고 싶은 시를 읽는 모임이다.
우리 동네에 이런 격조 높은 모임이 있었다니.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누구보다 시(詩)를 사랑하는 내가 가야 할 모임이다.
첫 모임은 광교산 초입의 전통찻집이다. 약속시간 보다 30분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황차를 주문한다. 황차는 야생에서 채취한 녹차, 쑥, 칡, 모시 등 새 순만 따서 가마솥에 덖은 차(茶)다.
나는 특히 칡이 품은 달콤 씁쓸함의 향을 좋아한다. 양주에서의 군 생활 시절, 이산 저 산을 오르며 선임들이 캐어 건네주던 칡뿌리. 2년의 고된 군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귀한 황차를 입에 조금씩 담아 혀를 굴려가며 향을 음미한다. 가방에서 김남조 시집을 꺼내어 한 구절씩 가슴에 새긴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딸랑딸랑, 찻집 현관에 매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며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된 여성이다. 슬림핏 청바지에 캐시미어 목폴라, 허리 벨트가 부착된 갈색 벨티드 코트를 벗어 팔목에 걸친 여성은 전통찻집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녀는 찻집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손님이 한 테이블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헉,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뛰는 거지? 왜 이러는 거지... 그녀가 나와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화끈해진다. 뭘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은.
그녀에게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시집을 펼친다. 가져간 김남조 시집의 제목이 하필 '심장이 아프다'인 것은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또각또각.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묻어버린 하이힐 소리가 멈추고 그녀가 내 앞에 선다.
시선을 위로 올리려던 찰나, 그보다 내 감각을 먼저 깨운 것은...
헉, 내가 좋아하는 그 향(香)이다.
애써 알아내지 않았던, 아니 알아내고 싶지 않아 우발적 설렘으로 남겨 둔 그 향(香) 말이다.
아니... 여기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야속한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고, 향과 함께 온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서있다.
막혔던 부비동이 확장되며 산소 유입이 늘어난 덕분일까.
옅은 두통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머리는 맑아진다.
그녀가 내 앞에 앉으며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시(詩) 모임에 오신 분 맞으실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