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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상담사 혜윤 씨의 한숨

by 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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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언니가 모두에게 커피를 돌린다.


평소라면 '더벤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날의 카페인과 수분 보충을 동시에 담당한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미계약분 하나를 털어내 성과급으로 1,000만 원의 인센티브를 챙기는 날이면 민경 언니처럼 커피를 돌리는 사람도 있고, 그냥 입을 싹 닦는 사람들도 있다.


'혜윤이 너는 뭐 마실래?'


민경 언니가 스마트폰으로 스벅 앱을 켜더니 나에게 넘겨주며 고르라고 한다.


나도 처음 들어왔을 때는 눈치가 보여, 늘 아메리카노를 골랐지만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 일임을 알고부터는 내 돈 주고 사 먹지 못하는 것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는다.


'제주 유기농 말차로 만든 크림 프라푸치노'


어차피 통합 결제되어 누가 뭘 시켰는지 모를 테니, 옵션 버튼을 눌러 슬그머니 샷도 하나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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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래미안 모델하우스에서 일하는 분양상담사다. 래미안 상담사들이 삼성물산 직원일 줄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사실 그 회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래미안 로고가 새겨진 배지에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쓰여 있으니 상담 고객들이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이렇게 좋은 회사에 다니니 얼마나 좋겠냐'라며 부러워한다.


어떤 지역에 아파트를 분양하면, 해당 건설사에서 직접 모델하우스를 운영하는 걸로 알겠지만 사실은 시공사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다.


시공사는 아파트를 팔기 위해 분양 대행사와 계약을 할 뿐이다. 시공사는 건축 전문가 집단이지 마케팅 전문가 집단은 아니기에 그렇다.


아파트 판매에 특화된 회사가 바로 분양대행사다. 시공사로부터 분양대행사로 선정이 되면, 분양대행사는 모델하우스 건립부터 직원 채용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을 위임받는다.


분양 홈페이지 구축을 담당할 회사를 찾아 계약을 맡기고, 언론에 광고도 하고, 모델 전문 회사에 연락해 도우미들도 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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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 대행사 제일 꼭대기에는 사장이 있고, 그 밑에 본부장이 있으며, 그 밑에 팀장이 있고, 한 개의 팀에 통상 10명 내외의 팀원들이 있다.


그중 나는 7 본부 3팀 팀원이다.


나름 인서울 대학을 나와, 대기업 면접을 전전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이곳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오래 근무할 생각은 없었고, 대기업 취업 전까지 용돈벌이나 할 요량이었다.


처음에는 모델하우스에 방문하는 고객들의 신발 정리 알바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프런트에서 예약 고객을 확인하고, 사은품을 나누어주는 자리로 옮겨 갔다.


이후에 모델 도우미 일당이 30만 원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6개월간 다이어트를 한 후 모델 도우미로 전향을 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나서야, 지금의 분양 상담사라는 타이틀을 얻고 비로소 내 책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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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 상담사들이 수입이 많을 것 같지만 우리는 철저히 성과급으로 수익을 가져간다. 즉, 고객이 분양 계약을 해야 나한테 수당이 떨어지는 구조다.


어디나 그렇듯 특출 난 사람은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민경 언니다. 민경 언니는 10년 차 분양 상담사다.


그녀는 영업 수완이 워낙에 좋아, 소위 준공 후 미분양이라고 하는 악성 미분양 대행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 롤모델은 민경 언니다.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 옆에 있어야 한다고, 비록 지금 실적은 보잘것없지만 내가 언니 옆에 꼭 붙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도 계약은 한 건도 못했다.


매일 오후 6시, 모델하우스 문은 닫히고 팀장 주관의 정신 교육이 이어진다.


"아니, 혜윤 씨는 커피 마시러 출근해요? 오늘이 벌써 금요일인데, 일주일 동안 혜윤 씨 찾아온 고객 하나 없다는 거 좀 심한 거 아닌가?"


이 시간 나는 늘 죄인이 된다.


"네... 안 그래도 예약한 고객이 주말에 오ㄱ..."


팀장이 내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교육을 이어간다.


"아, 됐고요. 예약한 고객이 전화로는 간다고 하지... 안 간다고 하나... 저렇게 감을 못 잡아서야 원..."


"여러분, 이거 생존이 달린 문제예요. 여러분들 그냥 전화 한 통 걸어서 받으면 하고 안 받으면 안 하는 그런 안일한 정신으로 해서 될 게 아니라고요.


다들 집에 가서 부동산 공부는 하는 거죠? 아니 요즘, 고객들 워낙 똑똑해서 다 알아보고 온다고요. 매일 신문 보면서 교통 호재 발표되는 거 있으면, 우리 단지랑 어떻게든 엮어서 시나리오를 짜야지. 그냥 멍하니 고객이 묻는 말에만 답하면 멍청이 되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하...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배도 고프고, 오늘따라 유난히 엄마도 보고 싶다.


시간이 한참 지나, 팀장님이 아차 싶었는지 한마디 거든다.


'아참, 민경 과장님은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늦겠다. 차 막히기 전에 얼른 출발하세요. 굳이 이런 교육 들을 필요 없잖아요 하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고객들한테 비선호 타입 추천하라니까 왜 자꾸 A 타입 추천하고 난리예요? 그건 하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다들 한다고 몇 번을 말해요. 안 나가는 걸 팔아야 선수지. 잘 나가는 건 팔라고 여러분들 여기 앉아있는 거 아니잖아요... 휴..."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멘탈이 탈탈 털리고 난 뒤,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띠뚜띠뚜"


힘없이 도어락 비번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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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우리 삼성의 딸 왔어? 엄마가 너 좋아하는 부추전 하고 있잖니. 호호. 어서 씻고 와서 먹자. 막걸리도 한잔 하고. 호호호."


오늘따라 엄마의 웃음소리가 철없게 들린다.


'엄마... 미안해 실은 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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