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러브의 아홉 번째 레터
<홀수의 방>, 박서영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있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방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패가 아니다. 그림자는 암호처럼 커진다. 씻어도 투명해지지 않는다. 젖어서 흐물흐물 찢어지면 내부를 들여다볼 텐데. 이젠 버려야 하나. 어차피 한패도 아닌데. 우리는 오로지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붙어 있다. 인정하자. 그러지 않으면 사랑에 빠져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으니. 가로등 불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윤곽을 돌멩이로 그려준다. 내가 떠나도 바닥에 남을 뭔가를. 기억은 순간순간 그림자들의 방을 뺏는 놀이 같아.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이별이란 무엇일까. 이별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난 사랑을 시작할 때면 언젠가 닥칠 이별이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왜 좋아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주길 원했지. 그가 날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그것을 잃지 않으면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한편으로는 이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미웠어. 찐득거리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었어. 버석버석하진 않더라도, 마치 핸드크림을 바르고 20분 정도 지난 손처럼 매끈한 정도의 애정. 그게 딱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연애였어.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어. 열과 성을 다해(정말 다-해서!) 연애했고, 사랑의 종말이 찾아올 때엔 할 수 있는 추접한 짓은 다했어(술 먹고 전화하기, 집 앞에 찾아가기 등).
그렇다 보니, 헤어지고도 의연한 사람만 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묻게 되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어른스러워?’ 그들의 답은 다 달랐고 뚜렷하진 않았어. 기억에 남는 답은 없었어. 다만 그걸 물었던 내 절박한 마음만 기억날 뿐.
<삵>중에서, 박서영
(…)
우리는 아무도 서로에게 망명한 적 없어
눈빛이 눈빛을 올라타고
왼손이 오른손을 올라탄 순간이 있더라도
털 사이로 피가 나지 않을 만큼
서로를 조금 할퀴다가 헤어졌을 뿐
(…)
그래,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 장석주 시인은 이 시를 평론하며, ‘사랑이란 서로에게 망명하는 일’이라고 말해. 맞아, 망명. 이민이 아니라 망명. 더 나은 땅을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가는 일. 그곳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로 가는 일. 그게 사랑이었던 거야. 그러나 <삵>의 화자는 겨우 서로를 할퀴는 정도에 그치고 말아. 그것도 삵의 발톱을 가지고, 찌르지도 못하고 할퀴는 정도로만 생채기를 내지.
가장 최근의 연애가 막을 내렸을 때 내게 서린 공포도 같은 결이었어. 훗날 사랑하게 될 이에겐 내 모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정제된 측면만을 제공하고 싶었어.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야. 내가 앞모습을 보여주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망명하지 못하고 겨우 할퀴는 정도에만 그치는 사랑을 한다면? 아마 내가 원하는 정도로 매끈한 연애가 되겠지. 그러나 내 마음은 디딜 땅을 찾아 여전히 방황할 거야.
다시 이별로 돌아와서. 사랑이란 망명이며,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 되는 일이야. 헤어지는 순간 이 기억은 흩어지고, 흩어진 기억들은 모조리 슬픈 단어로 채워져. 사랑하던 때에는 너와 나의 영혼이 하나였지만, 이별의 흔적(그림자)은 아프게도 상대방의 그림자와 한패가 아니야. 그러나 여전히 하나였던 기억을 가진 영혼은 서로를 ‘찌를 듯이’ 기억하지. 그렇다면, 이 기억의 시간 속에서 부지런히 서로를 잊는 연인의 모습은 어떨까?
<홀수를 사랑한 시간>중에서, 박서영
(…)
얼마나 열심히 잊었는지 풀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돋아난 곳
아 참, 그곳은 당신 집 앞 공원이었지
짝을 맞춰보는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다는 걸
혼자 식당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찢으며 깨달았지만
(…)
<홀수를 사랑한 시간>의 화자는 연인을 잊는 모습이 어떤지 보여줘. 털신이 필요한 때에 헤어져 풀이 돋아날 때까지 긴 계절을. 식당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찢는 잦은 순간마다. 그렇게 바지런히 기억을 헤매고 지우는 시간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깊었던 상실을 끌어안을 수 있어. 사랑하는 동안뿐 아니라, 우리는 서로를 잊을 때에도 부지런해야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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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레터에 실은 모든 시는 박서영 시인의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에 수록되어 있어. 박서영 시인은 만 4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책은 그의 유고시집 중 한 권이야. 모두 싣지는 못했지만 좋은 시가 많아. 이별의 슬픔과 상실감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감정을 이겨내려고 하지 않는 대신 침잠하고, 그 순간을 고요하게 담아내지.
이별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상실을 끌어안는 그 시간 모두가 고통이라고 말하는 시집. 울고 싶은데 우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연이들에게, 나 대신 아파해줄 글이 필요한 연이들에게 권하며 글을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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