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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노트북대신 독서, 몽상, 키스를! 북카페 PHIL

오스트리아 빈 - PHIL

by 김숲

채식요리자격증이 있는 변호사, 어느 지역을 가든 따뜻한 독립서점과 맛있는 채식식당을 찾는 그의 ‘몸은 가뿐하게, 마음은 충만하게’ 여행하는 방법



#해외 4- [오스트리아 빈 북카페 PHIL과 채식식당 Zina's Eatery]


빈 PHIL : 링 밖에서 만난 자유


피렌체에서 비행기를 타고 잠깐 졸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빈에 도착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던 빈으로의 이동은 서울에서 제주도를 가는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두 도시가 주는 느낌은 중세와 근대의 시간차만큼이나 달랐다. 너무나 깨끗하고 잘 정비된 도로, 크고 화려한 건물들 그리고 하나같이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지난 한 달의 이탈리아 여행 동안 동고동락한 샌들 사이로 자유분방하게 튀어나온 발가락들을 오므리고 말았다. 옆을 쳐다보니 파트너 역시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놓았던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다.


유럽의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던 19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세프는 수도 빈의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도심을 감싸는 대로를 만든 뒤 이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도시경관을 개편하여 황제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황권의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이 도시 재개발로 인해 새 건물들이 세워지며 도시 전체가 잘 관리된 박물관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IMG_1159.jpeg 링 슈트라세의 대표적인 건물인 국립 오페라 하우스


뭔가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할 것 같고 옷차림을 신경 써야 할 것 같은 이 느낌은 특히 빈 중심부인 ‘링 슈트라세( Ringstraße)’ 안에서 심해지는데, 말 그대로 둥근 원 모양의 링은 중세 빈을 지켜주었던 성벽이 있던 자리이자 지금은 링을 따라 들어선 국립 오페라 하우스, 빈 대학교, 국회의사당, 시청 등 주요 건축물들로 인해 빈의 대표적인 관광 동선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빈을 찾는 관광객들은 일정 내내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는 링 안 혹은 링 주변에만 머무르다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왕립예술가협회를 뛰쳐나와 자신들만의 예술사조를 만들어 낸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전시장 ‘제체시온’, 반듯하고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비정형성을 뽐내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처럼 반항심 가득한 사람들의 자취는 다 링 밖에 있었다.


그렇게 링 안과 링 밖의 빈을 비교하며 다니는 재미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링 밖이 최고다!!’를 외치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북카페 ‘PHIL’, 그리고 비건 식당 Zina’s Eatery였다.


IMG_5707.jpeg 북카페 PHIL의 입구에서부터 링 안에서 보기 드문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PHIL(필)은 Phil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Feel at home(필 앳 홈, 집처럼 느끼기)’이라는 콘셉트로 만든 서점이자 빈티지 가구 판매점이자 카페이자 바(Bar)다. PHIL의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토요일은 새벽까지)로, 낮에는 서점이자 간단한 식사가 가능한 카페이지만 밤에는 낭독회, 영화상영회,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의 중심이다.


‘집처럼 느끼기’라는 콘셉트 때문일까. PHIL은 모델하우스처럼 정돈된 빈에서 보기 드문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낡은 가구들은 사람들이 앉은 모양대로 푹 꺼져 있었고, 메뉴판은 너덜너덜했으며, 힙한 종업원들은 서빙 중간중간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만들어 테라스에 앉아 수다를 떠는 등 너무나 자유로웠다. (빈의 명물 중 하나가 수백 년 전통의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자신감 있는 혹은 불친절한 태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혁명 수준이다)


IMG_1366.jpeg 책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서점 코너의 맞은편에는 본격적인 카페/바 코너가 있다
IMG_1361.jpeg PHIL의 모든 가구는 생김새가 다르다. 앉은 모양대로 꺼져버렸지만 그대로도 멋진 소파


특히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것은 "노트북 사용 없는 공간 - 대신 독서, 몽상, 수다, 집필, 키스는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라는 재치 있는 안내문이다. 우리는 이곳을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사실 첫 방문에는 ‘Laptop Free Space(노트북 사용 없는 공간)’를 ‘자유롭게 노트북 사용하는 공간’라고 읽고 싶은 대로 읽은 나머지 한참을 각자의 태블릿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말았다. 브런치를 먹기 위해 Phil을 다시 찾은 날에서야 별안간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주로 자리에서 수다를 떨거나, 실내에서 체스를 두거나, 뭔가를 열심히 읽고 쓰고 있었다.


IMG_5786.jpeg 주인장의 경고(!)를 오해한 나머지 태블릿으로 책을 보고 있는 파트너의 모습
IMG_5911.jpeg PHILGOOD BREAKFAST라는 이름의 메뉴, 메뉴판에는 비건/베지테리언 메뉴 구분이 되어있다


늦은 오후가 되니 PHIL의 테라스 자리는 링 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유로운 차림새를 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PHIL뿐만 아니라 그 옆집, 그 옆집 모두 꽉꽉 들어찬 사람들로, 생명이 없는 명화 같았던 도시가 그제야 살아난 것 같았다. 무려 600년간 유럽 역사의 중심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클림트와 모차르트 같은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도시의 화려한 모습이 조금 부담스러워질 때, PHIL을 찾으면 좋겠다. 책 한 권,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링 밖의 삶을 경험해 보면 좋겠다.


유시민 작가는 '빈은 내게 너무 완벽한 도시', 한 마디로 ‘사기캐릭터’라며 그나마 낡고 쓸쓸해 보이는 바그너 기차역 건물에서 간신히 인간미를 찾았다고 했다. 그가 링 밖에서 PHIL을 만났다면, PHIL이 있는 그 거리를 밤에 걸어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아마 지금 우리처럼 인간미 가득한 빈을 그리워할 텐데 말이다.


글 김숲, 사진 Hajin


서점

* 이름 PHIL

* 위치 Gumpendorfer Str.10-12, 1060 빈 오스트리아

* 책방 주요 큐레이션 소설, 에세이, 여행책, 영어서적, 빈티지 가구 조명

식당

* 이름 Zina's Eatery

* 위치 Gumpendorfer Str.36, 1060 빈 오스트리아

* 카페/ 식사 주요 메뉴 및 가격대 두부스크램블 아보카도 토스트 11.9유로, 비건 팔라펠 볼 13.9유로

* 주요 장소들과의 거리 레오폴드 뮤지엄, 뮤지엄 카르티에 도보 4분, 빈 분리파 전시관 제체시온 도보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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