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는 충청도 시골에서 사셨는데, 쌀농사를 지으셨다. 밭도 몇 마지기 가지고 계셔서 주된 끼니는 보리, 감자, 고구마였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 궁금해서 여쭤본 적이 있다. "왜 쌀농사를 지었는데 쌀밥은 안 먹었어요?" 그랬더니, 큰돈이 되는 것은 쌀이니 쌀은 모두 팔기 때문에 나머지 작물을 드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 해 농사를 지어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자식들 학교 보내셨다. 그 옛날 시골에서 보통 여자아이는 중학교까지 남자아이는 고등학교까지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딸들이 고등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써서 논을 팔아서 보내셨다. 다음 아들도 고등학교를 보내야 하니 또 논을 파셨다. 그런데 대학까지 보낼 돈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빠는 스스로 벌어서 대학을 가겠다 마음을 먹고 시골에서 도시로 18살에 올라오셨다.
그 시절엔 주말도 없었댔다. 아침 6시에 출근준비를 해서 밤 9시, 10까지 일을 하고 자취방에서는 잠만 자는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자취할 때 아빠의 노하우를 알려주셨는데, 직접 요리해 먹을 때는 요리를 20분 안에 마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점심 1시간 휴식시간 중에 요리하고, 식사하고, 학교(또는 직장)까지 왕복할 생각 하면 요리를 20분 안에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그렇게 20대를 사셨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셔서 아빠 당신이 대학을 간 것이 아니라 동생의 대학 진학을 도우셨다. 아빠도 대학을 가고 싶으셨는데, 동생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고 하셨고 그 이후엔 엄마를 만나고 아이를 낳아 타이밍을 놓치셨다고 한다. 계속 남을 위해 사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지금도 자식인 나를 위해 살고 계시니 말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장사를 하시며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어렸을 적 이모들과 엄마도 여기서 학교를 다니다 금세 다른 학교로 전학 가고를 반복하셨다. 그런데 그 시절엔 학교 전산망 시스템도 없으니 전학을 우편으로 관리했고 그 때문에 먼 지역으로 이사하면 길게는 한 달까지도 학교를 안 다니는 기간도 있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어렸을 적 엄마는 몸이 너무 약하셨다. (사실 지금도 약하시다.) 학교를 가기 위해 작은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도 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했고 툭하면 몸살이 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아무 이유 없이 토를 하셨다. 먹은 것도 많이 없는데 토를 했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도 계속 나왔댔다. 기진맥진 한 상황을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아이가 곧 죽을 것 같았다고 하셨다. 급히 택시를 잡아 병원에 갔더니 급성 맹장으로 맹장이 터진 상황이었다고 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니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 엄마가 더 반쪽이 되어 나온 것 같았다고 하셨다. 엄마가 기억하는 수술대는 거의 널빤지 같았다고 했다. 또 요즘엔 맹장수술을 하면 거의 수술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 배엔 제왕절개 수술자국 이외에 맹장 수술자국이 선명하다.
엄마는 둘째이다. 그중에서 몸도 가장 약하고 먹는 속도도 가장 느리다.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엄마가 한 술 뜨면 벌써 이모, 삼촌들은 밥 절반은 드신 것 같았다고 한다. 매번 잘 못 먹는 둘째가 안쓰러웠는지 첫째 이모가 과자를 사 와서 먹으라고 했던 적이 있었댔다. 그때 혼자 다 먹으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곤소곤 부스럭부스럭 먹고 있었는데, 그 작은 소리를 어찌 듣고 막내가 "나 빼고 뭐 먹어!" 하며 와서 결국 또 같이 먹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할머니가 홍시를 구해오셔서 한 사람 당 하나씩 주셨다. 그래서 엄마는 나중에 제일 잘~ 익었을 때 먹으려고 아궁이 위에다 올려놓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또 막내가 홀라당 먹어버렸댔다. 아직도 그게 억울하신지 가을만 되면 홍시를 박스 째 사다 드시고, 매번 드실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신다.
보통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놀러 갔던 이야기, 재밌었던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데,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은 헌신한 이야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 같아 안쓰럽다. 계속 남을 위해 사신 어머니, 아버지가 이제는 당신들의 인생을 재미있게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