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걷기로 마음먹고 그 첫 지점인 생장에 잘 도착했다. 알베르게에서 잘 자고 다음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한 지 6시간도 되지 않아서 한국인 세분을 만났다. 뜻하지 않게 그분들과 약 4일간 동행하게 되었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나 같이 며칠을 보낸다는 게 엄청난 우연이다. 그러나 이 산티아고에서 만큼은 꽤나 흔한 일이다.
순례자 사무소의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이 순례길을 방문하는 나라의 순위에서 한국은 7위를 차지했다. 비유럽국가 중에서는 2위에 해당한다. 인천 공항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약 8시간 비행을 고려한다면 이는 엄청난 순위에 해당한다. 또한 약 8시간의 시차도 극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한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하는 걸까? 단순히 등산을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그럴까?
나는 33일간 산티아고를 걸으며 총 한국인 여섯 분을 만났다. 속으로 참 많이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적은 숫자였다. 종종 외국인들이 나에게 "한국인들이 산티아고에 왜 이렇게 많이 와?"라고 물었을 때,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몰랐다. 그래서 "나 잘 모르는데,, 한국인 많이 만났어?"라고 물으면 대부분 열명은 넘게 만났다고 이야기했다. 반신반의했지만 그들이 배운 한국말 어투를 생각하면 믿을 만한 숫자였다.
그로뇽에 도착해서 알베르게에 모인 순례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만드는 자리에 있었다. 한 외국인이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한국이라 답했고, 어김없이 나에게 한국인이 왜 이렇게 산티아고에 많이 오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외국인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잘 모르겠다는 질문에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오히려 다른 외국인들에게 물었다. "스페인/프랑스/호주/이탈리아 사람들은 산티아고에 왜 이렇게 많이 와?" -실제로 저 4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답변은 달랐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은 산티아고가 풍경도 멋지고 거리도 가까워서 트래킹 하기에 적합하다고 이야기했다. 호주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하고 어드벤처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자신이 졸업 후 대학을 갈지 혹은 일을 할지,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려고 길을 찾는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이유는 아니다.)
약 30일 차쯤 싸리아를 넘어선 시점이었다. 이 날은 혼자 밖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아저씨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 사람이야? 너는 여기에 왜 왔어?" 처음 만난 순례자들과 보편적으로 하는 질문에 비슷하지만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또 시작했다. 말이 끝났는데 이탈리아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셨다. "내가 만난 한국사람들 전부 자기 일을 그만두고 왔대! 너도 그렇네!" 이에 살짝 당황했다. "당연하지. 한국에서는 휴가를 길게 쓸 수 없어. 그리고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정말 멀어. 그러니 일을 그만두고 올 수밖에!"
저녁을 기다리다가 시작된 대화
그 대화를 한 후 곰곰이 생각했다. 많은 한국인이 산티아고에 오는 근본적인 이유가 일을 그만둔 김에 오는 것일까? 그동안 휴가를 길게 못 가졌으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도 일을 그만두고 산티아고에 왔으니 말이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약 70%가 번 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발표했다. 번 아웃 증후군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되어 무력증, 우울증 등을 겪는 현상을 말한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끈기 있고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 갔을 것이다. 그중엔 안타깝게도 '번 아웃'이 되어 에너지를 모두 잃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다시 회복하고자, 이제는 자신을 알아가고자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아닐까. 약 800km, 평균 35일간의 여정에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기 때문에 다시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길거리 휴게소
하루는 17km로 아주 짧게 걷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그래서 아침 느긋하게 나와 예쁜 꽃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걷다가 bar도 나오면 들려서 커피도 마시며 한 껏 여유를 부릴 생각이었다. 그날따라 숲 속에 안개가 자욱해서 풍경이 몽환적이었다. 그 안개를 뚫고 길을 걷는데 길 위에 휴게소가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신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한 아저씨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조개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까이 갔다. 알고 보니 아저씨가 그 휴게소 사장님이셨다. 자신이 만든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씀하시기에 한 잔 받았다. 1유로밖에 안 하는 커피에 딸기도 두 개 주셨다. 옆 밴치에 앉아서 같이 노래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사장님과 몇 마디 스몰토크를 했다.한국인들은 참 사교성이 좋아서 한국사람들이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일을 휴가도 없이 너무 열심히만 한다고 안타까워하셨다. "한국인들은 마치 삶이 일인 거 같아. 스페인 사람들은 일도 삶일 뿐인데. 무슨 차이인지 알지? 우리는 일하는 것도 즐겨. 지금 나처럼 말이야."일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멋진 마인드이다. 하지만 일을 즐기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다. 언제나 어려움은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 힘든 마음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좌) 안개낀 숲 (우)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
그제야 첫날 알베르게 사장님이 해 주신 말이 들어왔다. "이건 경쟁이 아니야. 걸으면서 너의 몸이 하는 소리, 마음이 하는 소리에 집중해. 꼭 쉬어야 할 때를 놓치면 안 되거든. 그 소리를 무시하지 마." 걷다가 무릎이 아프면 파스를 바르고 그날 저녁은 멀리 걷지 않고 알베르게에서 쉬거나 다음날에 적게 걷거나 하는 등으로 컨디션을 조율했다. 일상에서도 몸이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면 쉼을 갖는다. 비슷하게 우리의 마음 상태도 매일 점검하고 회복을 위해 쉼을 가지며 일상을 조율해야 하지 않을까?
(좌) 햇살 쬐며 쉬기 (우) 강아지 만지면서 쉬기
산티아고 Tip_알베르게 예약 편
알베르게 예약은 필수는 아니에요. 하지만 성수기 시즌인 5월 9월에는 순례자들이 많아서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예약을 해 두면 잠자리를 안심할 수 있답니다. 예약은 부킹닷컴과 같은 숙소 예약 어플을 이용해서 할 수 있어요. 이 어플을 사용하면 알베르게 주인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일 없이 어플 안에서 예약을 확정할 수 있어서 편리하답니다. 하지만 어플에 등록되지 않은 알베르게가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buen Camino라는 어플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 어플은 그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 정보가 모아져 있고 사장님의 What's app(외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어플) 연락처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다만 직접 소통해서 예약을 잡아야 해요. 영어가 부담스러우신 예비 순례자 분들을 위해 예약 문자 팁을 드릴게요.
Hello. I'm (본인 영문 이름) from South Korea.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누구입니다. I'm walking camino. 저는 순례길을 걷고 있어요. I'd like to stay in your albregue on 날짜. 저는 당신 알베르게에 이 날짜에 묵고 싶습니다. (날짜 입력에 주의해야 해요. 외국은 날짜를 일/월/년 순서로 우리나라와 거꾸로예요!!) Do you have an available bed? If you have, I want to make a reservation. 사용가능한 침대가 있을까요? 있다면, 예약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Yes, we have space for you! 응, 너를 위한 공간이 있어. / We will reserve the bed for you. 너를 위한 침대를 예약해 둘게. / Ok. I confirm your reservation. 너의 예약 확인했어./ I'm very sorry. The albergue is fully booked. 대단히 미안. 알베르게 예약이 다 찼어. 등과 같이 답변이 올 거예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면, Thank you. See you. /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면, 다른 알베르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답니다. 모두들 buen cami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