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산티아고를 걷겠다고 처음마음먹었을 때는 엄마와 함께 걸을 생각이었다. 엄마도 걷는 걸 좋아하고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엄마와 약속도 했다. "엄마 은퇴하고 나도 일 안 하고 있으면 그때 같이 걷자." 이때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모녀의 특별한 여행의 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고자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 그 길을 '혼자'걷고 싶었다. 어쩌면 나와 관계된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가게에서 혼자 국밥을 먹을 수 있는, 혼밥 레벨 4 정도 되지만 단 한 번도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은 없었다. 더욱이 지금까지 했던 여행 중 최장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혼자?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현실이 더 무서웠다. 다만 혼자여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돌아다니기를 결심했다.
심심하지 않아?
산티아고를 혼자 가겠다고 하면 "30일 동안 혼자 다니면 심심하지 않아?"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온다. 맞다. 심심하다. 게다가 비성수기인 8월 중순에 가서 길 가다 마주치는 순례자들도 적었다. 피레네 산맥에서 만난 한국인 분은 심심할 때 노래를 들으며 걷는다고 하셨다. 그 분과 헤어진 후 며칠 만에 톡을 했는데, 혼자서 코인 노래방 6시간은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노래를 들어도 걷기만 하는 그 무료함을 떨치기 힘든 날도 있다.
그 넓은 대자연 속에 하늘과 땅 사이 나 홀로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나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루 6시간 동안 혼자 걸으며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 중 어떤 것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어떤 것은 재해석하며 어떤 것은 새롭게 인싸이트를 얻었다.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기에.
피레네 산
일출
혼자 걷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
오히려 혼자 걷기 때문에 경험한 신기한 일들도 있었다. 하루는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어 쉬고 있었다. 갑자기 미국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물으셨다. 도움이 필요하신가 해서 영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할머니는 활짝 웃으시면서 "나 오늘 하루 종일 한마디도 못했어~ 너랑 대화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다."라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날은 하루종일 혼자 걸었던 터라 잠깐의 대화였지만 반가웠다.
잠깐 스몰토크만 할 줄 알았는데 그 할머니가 같이 이 마을에 있는 유적지와 성당에 가자고 제안하셨다. 당연히 수락했다. 마을을 산책하며 유적지를 보고 함께 성당에도 들어갔다. 비록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아서 유적지와 성당에 있는 작품의 설명 글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또 할머니께서 성당에 콘서트가 열린다는 정보를 들으셔서 덕분에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오르간 연주와 플룻, 성악 공연을 봤다. 연주자 혼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었지만 웅장하고 근사했다.
그 이후에 할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려던 참에 가게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셨는데 이 할머니와 이전에 만난 다른 순례자 분들이었다. 합석하기로 해서 미국인 할머니들 4분과 한국인 나 한 명이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유쾌하신 할머니들 덕분에 웃으며 저녁을 먹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특별한 저녁을 보냈다.
오르간 연주 공연
미국인 할머니들과의 저녁식사
이뿐만 아니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게 되는 날도 있다. 저녁을 먹으러 가게에 주문을 하려는 찰나 한국분을 만났다. 그분은 다른 외국인들과 밖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혹시 합석하겠냐는 제안에 그날은 날씨가 추운 탓에 식당 안에서 저녁을 먹고 싶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손에 15유로를 쥐어주셨다. 저녁을 함께 먹는 것도 아닌데 저녁을 얻어먹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사양하려 했으나 그분은 순례길에서 젊은 청년을 만나면 꼭 사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냥 맛있게 저녁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 돈을 끝내 받았다.
이날은 저녁을 사주셔서 감사하다! 저녁을 공짜로 먹어서 신난다! 의 정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적은 예산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서든 돈을 아끼는 방법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좋은 알베르게에서 푹 쉬기보다는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를 다녔고, 매번 식당에 가기보다는 마트가 있으면 마트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왜 여행까지 와서 그렇게 해? 하겠냐마는 나에게 순례길은 단순히 놀고먹는 여행의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산이 풍족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 한국분께서 사주신 저녁 한 끼가 정말 감사했고 감동이었다.
사주신 저녁식사
다른 신기한 일도 있었다. 레온이라는 큰 도시가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그 도시에 머물지만 나는 유명한 성당을 보고 점심을 먹고 다음 마을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 도시에 도착해서 잠시 성당 위치를 볼 겸, 잠시 쉬기도 할 겸 배낭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외국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서 스몰토크가 시작이 되었다. 짧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 외국분이 다시 오시더니 "우리랑 같이 시티 투어 열차 탈래?" 하셨다. 이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차례 사양했지만, "내가 널 위해 계산했어. 곧 열차 떠난다. 빨리 와~" 하셨다. 그래서 뜻밖에 레온 시티투어도 하게 되었다.
열차타고 본 레온 성당
이외에도 맥주 값을 안 받고 서비스로 주신 스페인 가게 사장님, 길을 걷다가 대뜸 나에게 산티아고 유명한 성당 사진의 엽서를 주신 분 등등.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 뜻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과연 내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이 순례길을 걸었더라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어쩌다가 만난 미국인 할머니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미국인들과 둘러싸여 저녁을 먹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동행자와 저녁을 먹지 않았을까?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분께서 사주신 저녁 한 끼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을까?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면 그날 만난 외국인과 투어 열차를 함께 탔을까?
혼자 걸었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만남, 뜻밖의 선물들을 받았다.
산티아고를 한 참 걷고 있을 때 한국에 있는 친구도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사진 몇 장을 보내며 꼭 걸으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언니와 함께 걸을지, 혼자 걸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혹시 같이 걷게 되면 싸우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고 했다. 순례길을 걷고 싶은 독자 분들도 이런 고민을 할 거라고 생각된다. 혼자 걷기에는 조금 무섭고, 누군가와 함께 걸으면 싸우게 될 거 같고. 사실 이에 대한 조언은 없다. 다만, 혼자 걷게 될 때와 누군가와 함께 걷게 될 때, 이 둘은 분명 다른 순례길이 될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_알베르게_베드버그(진드기) 편
매일 수십 명씩 이용하는 알베르게이다 보니 베드버그가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합니다. 게다가 베드버그에 물리면 약하게는 가려움증 심하게는 알레르기 반응에 의한 쇼크까지 올 수 있어요. 따라서 베드버그에 대한 준비를 하는 건 중요해요.
베드버그 퇴치제를 챙겨가세요. 하지만 이 퇴치제는 100% 막아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잠자는 시간 내내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따라서 배낭은 침대 위에 올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또한, 침대 커퍼를 씌우기 전에 베드버그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살핀 후 퇴치제를 뿌리고 커버를 씌운 뒤 그 위에도 뿌리세요. 자기 전에도 한 번 더 뿌려서 베드버그를 예방해 주세요. 알코올 솜도 준비하면 좋아요. 베드버그에 물리면 심한 가려움증을 느낄 수 있어요. 이때 긁게 되면 더 안 좋아질 수 있으니 알코올 솜으로 가려운 피부를 닦아주세요. 차가운 알코올 솜이 가려움을 완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베드버그에 물렸다면 샤워하시고 가지고 있는 모든 옷, 침낭, 배낭 등등 세탁하는 게 좋아요. 어디에 숨어있다가 또 물릴지 몰라요.
그런데 사실 이 베드버그는 완전히 알베르게 사장님 탓이 아닐 수 있어요. 순례자들이 베드버그를 가져와 옮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답니다. 그게 본인일 수도 있고요. 이 말의 요점은 베드버그가 나왔다고 해서 알베르게 사장님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종종 순례자는 알베르게 탓을 하고, 알베르게 사장님은 순례자 탓을 할 때도 있답니다. 만약 베드버그가 나와서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공격적으로 대응하신다면,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당신은 베드버그를 퇴치하기 위해 이 숙소를 소독해야 하니까요."라고 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