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기
[길을 몰라서 길을 걷습니다]는 매주 금요일에 발행됩니다.
<글 읽기 전 산티아고 용어>
bar(바) = 우리나라 카페와 비슷한 개념. 커피, 음료, 토스트 등을 파는 가게.
albregue(알베르게) =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
pilgrim(순례자) = 산티아고를 걷는 모든 사람들
언제나 취향이 확고한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취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어서 그들만의 색깔이 드러난다. 옷을 입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품들이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마치 그 모습은 본인 스스로를 잘 알고, 본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나는 뚜렷한 취향이라고 말할 것이 없는 어중간한 인간이다. "음료는 뭐 좋아해요?"라는 흔한 질문에도 "아무거나 다 상관없어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해 버리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람.
총 33일간 순례길을 걸으며 모든 순간의 의사결정은 나 자신이다. 무언가의 yes 또는 no를 결정하는 건 순전히 나의 기준에서 이루어진다. 이 수많은 경험들 속 의사결정을 통해서 나의 좋고 싫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이러한 발견은 나의 취향으로 이어졌다.
의도치 않게 두 마을을 더 걸어가 하루에 31km를 걸은 날이 있다. 땡볕을 걷느라 더 이상 걸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어서 두 마을을 더 걸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다고 느껴질 때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상태가 어떠하든 오늘 난 여기에 머무르겠다 생각하고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히 도착한 그 알베르게가 그때까지 이용했던 알베르게 중 가장 깨끗했고, 사장님이 직접 해주신 저녁식사도 정말 맛있었다. 알베르게에서 맛있는 걸 먹고 배부르게 잘 쉬니 몸이 회복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알베르게에 오기 전까지의 힘듦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이때부터였을까? 이후의 여정에서는 알베르게를 신중하게 골랐다. 구글에 들어가 리뷰를 보고 가고 싶은 알베르게를 정했다. 그 알베르게의 위치에 따라 하루에 걷는 양도 결정했다.
그렇게 여러 알베르게를 이용한 결과 내 취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로 아기자기한 느낌의 소품과 공간을 좋아한다. 필요한 가구와 공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을 때 알 수 없는 안락함과 안정감이 있고, 뭔가 귀엽다. 그래서 가구들과 공간이 굳이 클 필요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딱 내가 좋아할 만한 귀여움을 담을 만큼만.
둘째, 적은 인원을 수용하는 알베르게가 좋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알베르게일수록 사람은 많이 마주치지만, 마주치기만 할 뿐 그 사람들과 대화 한 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알베르게는 그곳을 이용하는 순례자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많은 것은 공유한다. 때로는 알베르게 사장님과도 친해져서 순례길에서의 유용한 팁들을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순례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나만의 순례길 추억을 만든 것이 좋았다.
알베르게가 만족스러우면 마치 하루가 완성되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공간이 좋았고 그 좋음은 마음의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마을에 대해서도 선호도가 생겼다. 순례길을 걸으며 큰 도시보다는 작은 마을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큰 도시는 식당과 카페, 마트, 약국도 있어서 편리했지만 복잡했다. 자동차가 다니고 실 거주민들과 여행객, 순례자들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작은 마을은 자동차와 사람 수보다 참새와 제비들이 더 많았다. 또 마을에 하나씩 있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고 마을에 하나 있는 빵집에서 고소한 빵 향기가 퍼졌다. 이런 정겨움 때문일까 나중에는 유명한 큰 도시도 쿨하게 지나치고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를 골라 그곳에서 머물렀다.
언젠가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에 채식을 시작한 적이 있다. 물론 빨간 고기만 먹지 않는 약한 수준의 채식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주일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기가 빠진 음식을 먹을 때마다 더 강하게 고기 생각이 났다. '아! 된장찌개에 차돌 들어가면 훨씬 맛있는데!' '아! 냉면 육쌈해서 먹으면 더 맛있는데!' 매번 고기타령 하는 나를 보고 육식을 더 선호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때도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하루는 알베르게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함께 식당에 갔다. 메뉴판에는 채소 메뉴, 연어 메뉴, 갈비 메뉴가 있었다. 당연히 채식은 제외하고 연어와 갈비를 고민하던 중 가게 사장님의 추천으로 갈비 메뉴를 골맀다. 갈비는 꽤나 먹음직스러웠고 실제로 맛있었다. 그러나 접시에 초록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같이 나온 채소는 감자. 갈비를 먹으며 계속 샐러드 생각이 났다. 갈비를 먹다 먹다 물려버려서 결국은 1/3밖에 먹지 못했다.
이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채소만 좋아하지도 고기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항상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를 더 좋아했다. 예를 들면, 월남쌈과 샤브샤브와 같은 요리말이다. 삼겹살을 구워 먹어도 파절이, 양파, 마늘을 상추쌈에 한가득 넣고 먹었다. 돈가스를 먹어도 돈가스 크기만큼 양배추 샐러드를 먹었다.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니 그 이후부터는 식당에서 실패하는 확률이 줄어들었다. 또한 한 번의 식사에도 만족감이 커졌다. 나의 취향을 안다는 건 이런 작은 성공 확률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다. 해가 뜨기 전 하늘에 있는 별을 보는 것과 일출을 보는 것이다. 파란 하늘을 보는 것도 좋다. 원래도 하늘을 보는 건 좋아했지만 순례길이 아닌 일상이라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길을 걷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이 너무나도 예뻐서 그 이후부터는 일부러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섰다. 해가 뜨기 전의 시간이라면 7시 이전이다. 준비하고 나오기 위해서는 6시에 기상해야 한다. 상당히 이른 아침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직 세상이 밝기 전에 나와서 나의 조명을 모두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보인다. 별들이 참 많았다. 별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조그마한 해드 렌턴에 의지해 걷다 보면 해가 뜰 시간이다. 하늘이 붉은색으로 변한다. 그럼 렌턴도 끄고 다시 뒤를 돌아서 일출을 봤다. 일출을 보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간식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하늘을 보는 건 나의 작은 루틴이자 자연을 보며 치유하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니 언제나 최선보다는 차선을 선택했다. 이는 불편함은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최고의 만족을 주지도 않았다. 이러한 선택에도 큰 불만 없이 살았지만 나의 취향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불만 없는 삶보다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취향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험 이후에 그 경험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이 나와의 연결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이 짧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난 지금도 여전히 취향을 찾고 있다. 취향을 안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가득 채울 때,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은 날도 나름 괜찮은 하루였다고 마무리할 수 있는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_나만의 순례길로 만드는 방법
한국인들은 순례길에 오르기 전에 치밀한 사전 조사를 합니다. 또, 까미노 친구들 연합과 같은 네이버 카페와 오픈 채팅방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정보, 후기들을 많이 수용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순례길 어느 도시 맛집을 검색하면 대부분 비슷한 가게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정보를 얻으면 여행에 큰 실패를 줄여준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큰 단점은 여러분 취향에 맞는 더 좋은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더 커요! 예를 들어, 블로그에 나온 가게에 가서 블로그에서 맛본 음식을 주문해 먹는 건 그 블로그 필자의 여행이자 까미노이지, 여러분 당신의 까미노는 아니에요!
블로그나 카페에 나온 정보는 정보로서 가볍게 읽으시고 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주어지 기회와 여러분의 취향에 맞는 선택에 맡겨보는 건 어떨까요?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bar가 나오면 여유롭게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거나, 저녁을 고를 때 블로그보단 여러분의 입맛을 믿어보는 거예요. 오히려 남들이 가지 않은 곳을 방문하여 여러분만의 특별한 까미노를 만들어보세요. 실패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으세요.
"내가 순례길을 걷는다고 하니까 이전에 다녀온 친구가 이 도시에는 이 가게에 가야 하고 저 도시에는 저기에 가야 하고 추천을 하더라고요. 좋긴 한데, 내가 말했어요. 그건 네 까미노지 나의 까미노가 아니라고.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거야." -미국인 아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