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키우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것이었다
한 번은 건강검진 예약을 하려고 센터의 사이트를 둘러보는데, 알레르기 검사라는 항목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비염으로 고생을 하거나, 갑자기 밥을 먹고 나서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는 경험이 종종 있었던 경험이 떠올라 예약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궁금해서 알레르기 검사를 받으러 갔다.
예전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강아지와 신나게 장난을 친 후 발진 같은 것이 생겨서 강아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파로와 함께 산 몇 년 동안 그렇다 할 알레르기 반응은 없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이었을 뿐, 의학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냉철했다.
알레르기의 척도를 판단하는 숫자가 1부터 6까지 있었는데, 나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의 등급이 6등급이었다.
자세하게 알아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갑자기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비염 증상이 도지는 경우가 다 파로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파로가 뭘 잘못했는가?
굳이 잘못을 찾자면 나를 처음 만났던 날 내 모습을 보고 폴짝폴짝 뛴 게 유일한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양이를 데리고 오기 전 알레르기검사조차 하지 않았던 멍청한 내가 잘못이 훨씬 크다.
그렇다 한들, 그냥저냥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저 Class 6 이라는 수치도 그렇게 치명적인 수치는 아닌가 보다 싶다.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파로가 고생하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통해 파로와 나는 서로 함께 사는 관계라고 정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날려대는 털 때문에 집에 있는 어두운 색깔의 면 티는 모두 버렸다.
디퓨져 같은 향기가 나는 것들이 고양이에게 안 좋다고 해서 사용도 하지 않은 새 제품들까지 모두 버렸고, 안 그래도 좁아터진 집에 파로가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숨숨집 같은 것들을 여기저기 배치했다.
한 번은 반건조 오징어를 먹으려고 전자레인지에 잠깐 돌렸는데, 그 오징어 냄새가 집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채고 울더라. 이젠 집에서 오징어도 못 먹는다.
내가 없을 때는 잠만 자지만, 같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아이이기에 빛에 민감한 나여도 방문을 열고 잠에 들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적응해서 대낮에도 잘만 잔다.
더 말하자면 이 주제로만 몇 개의 글이 나올 것이다.
결론은 적응과 변화는 동물이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편이 빠르다.
흔히들 강아지 키우세요? 고양이 키우세요? 같은 말들을 주고받곤 한다.
그 키운다는 단어 자체가 불편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누가 누굴 키우고 하는 개념은 아니기에 '그게 아니고 이제는 같이 살아요' 라고 말한다.
파로는 알아서 큰 거지 내가 키운 것은 아니다. 심지어 지금은 더 커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파로라는 존재를 책임져야겠다, 라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파로가 날 키우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루가 가는 게 아쉬워 혼자 술 한잔하고 결국 우울해져 무기력하게 쳐져있거나 하게 되는 날들도 사라졌고, 치가 떨릴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 벌어지는 경우에도 문득 파로의 얼굴을 보면 그게 그렇게 까지 큰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파로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걸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파로가 나에게 알려주려고 작정한 것들은 아닐 것이다.
그냥 그 존재가 내 옆에 머물면서 저절로 알게 된 것들이겠지만 그럼에도 파로가 없었다면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소한 것들을 잃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잃어도 되는 것들이었다.
대신에 소중한 존재를 얻었고, 잊어선 안될 감정들을 느꼈다.
다시 생각해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다.
나는 내일도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집에서 눈을 뜨고 밥을 해 먹을 것이다.
음식 위에 살포시 올라가 있는 너의 털을 무심하게 털어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