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쿠다 히데오, 《오! 수다》
B27. 안목과 재능 / 《오! 수다》 -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진원 옮김, 지니북스
안목
‘안목(眼目)’이란 무엇일까요?
오쿠다 히데오의 이 기행(紀行) 에세이집 《오! 수다》를 읽다가 저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문득 읽기를 멈추고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여행객이 뜻밖에도 멋진 풍경이나 신기한 풍물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잠시 걸음을 멈추듯이 말이지요.
센류라도 읊어볼까?
“여행자는 선상에서 나이를 먹는다.”
재능이 없다.
이 대목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그 점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릴 수밖에 없네요.
제가 이 대목에서 읽기를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안목’이라는 말이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느닷없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센류(川柳)’란, 우리로 치면 ‘시조’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니까 일본의 전통 시 형식의 하나입니다. ‘여행자는 선상에서 나이를 먹는다’라는 문장 자체가 센류의 한 작품이지요. 제가 읽기를 멈춘 것은 ‘재능이 없다’라는 부분에서였습니다.
재능
이 ‘재능이 없다’는 오쿠다 히데오의 말입니다.
요컨대, 그는 ‘여행자는 선상에서 나이를 먹는다’라는 센류에 대하여, 더 정확히는 이 센류를 지은 작자에 대하여 ‘재능이 없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자는 물론 오쿠다 히데오 본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오쿠다 히데오는 스스로 어떤 감흥에 젖어 순간적으로 이 센류를 ‘한껏 폼을 잡고’ 지어 읊조려 보았지만, 스스로 자기 입으로부터 나온 그 센류 한 줄이 몹시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능이 없다’라고, 아마도 겸손하게, 혹은 자조적으로 한마디 한 것입니다.
물론 센류에 대하여 잘 모르는 저한테는, 고백하건대, 오쿠다 히데오의 이 말이 겸손인지 아닌지 판별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저 이 대목에서 문득 제 머릿속에 ‘안목’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순간 저는 읽기를 멈추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재능(才能)’이라는 말이 이 '안목'이라는 말에 따라붙었지요.
안목과 재능―.
이것이 제가 지금부터 쓰려는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을 읽는 안목, 글을 쓰는 재능
안목과 재능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입니다. 쓰임새 자체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이 말들을 ‘글’이라는 말과 연결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안목의 경우에 ‘글을 읽는 안목’이라고는 해도 ‘글을 쓰는 안목’이라고는 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안목’은 ‘읽다’라는 동사와는 잘 어울리지만, ‘쓰다’라는 동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능’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글을 읽는 재능’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어딘가 썩 잘 어울리는 느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재능’이라는 표현은 제법 잘 어울리지요.
이것이 안목과 재능이라는 두 말이 지닌 쓰임새의 차이입니다.
하면, 이 두 말을 서로 연결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글을 읽는 안목은 있지만, 글을 쓰는 재능은 없다.’
그렇다면 반대의 표현은 어떨까요?
‘글을 쓰는 재능은 있지만, 글을 읽는 안목은 없다.’
어쩐지 말장난 같은 느낌인가요?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글을 읽는 안목이 없는 사태는 기본적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글을 읽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재능이 없는 경우는 제법 있을 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안목과 재능은 함께 갈 수도 있고, 함께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저는 지금 하려는 것입니다.
재능은 없지만, 안목은 있다
당연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함께 가지 않는 경우겠지요. 그러니까 ‘재능은 없지만, 안목은 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를 일찍이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1985)에서 이미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살리에리(F. 머레이 아브라함) 말입니다. 모차르트(톰 헐스)만 한 재능은 없지만, 모차르트의 작품에 담긴 천재성을 엿볼 줄 아는 안목은 있었던 인물―.
그래서 살리에리는 자신에게 모차르트만 한 재능이 없다는 자각에서 오는 콤플렉스로 말미암아 평생 불행했습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로 그려져 있지요.
그렇다면 ‘재능 없는 안목’은 저주일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의문을 둘러싸고 슬금슬금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는 안목, 영화를 만드는 재능
영화에 국한해서 한번 말해볼까요.
세상에는 영화에 관한 수많은 글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글들의 성격은 그 글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영화를 칭찬하는 글도 있고, 비난하는 글도 있습니다. 단순히 소개하는 글도 있고, 깊이 있게 분석하는 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글이 결국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안목, 특히 해당 영화나 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글쓴이의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쓰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능은요? 이 경우, 이 글의 논리성을 살리려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재능’으로 범주를 국한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영화를 만드는 재능’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안목은 있지만, 만드는 재능은 없는 경우 말입니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그 각각에 필요한 현실적인 여건이 너무도 다르므로 대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또, 만드는 재능의 유무를 가리려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선결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그 결과를 놓고 그 결과의 주인한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별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재능을 통하여 안목 드러내기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그러니까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또는 안 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스스로 ‘나는 영화 만드는 재능은 있지만, 만들지 않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지간히 겸연쩍고 머쓱한 일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당당히 공표할 수 있으려면 그 증빙자료로서 어떤 결과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주장하면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말은 누가 못해!”라는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겠지요.
그러니 영화를 직접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혹은 않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자기 재능에 대하여 일단 겸손하게 입을 다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목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 대해서 그랬듯이, 영화를 보는 안목은, 영화를 만드는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한테나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우리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영화를 보는 자신의 안목을 어쨌거나 드러내고 있는 셈일 테니까요. 자랑이나 과시(誇示)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스스로 드러낼 의도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저절로 드러나는 현상만큼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재능을 동원하여 영화를 보는 안목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셈이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