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야베 미유키, 《이유》
B26. 인터뷰, 가공할 만한 진실 규명의 수단 / 《이유》 -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인터뷰와 탐문
흔히 ‘수사(搜査)’라는 말과 사이좋게 붙어 다니는 ‘탐문(探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수사 용어의 하나가 바로 ‘탐문수사’ 아닙니까. 경찰 또는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에서 이 말, 또는 이 말이 의미하는 행위가 안 나오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국어사전은 이 말을 ‘더듬어 찾아가 물음’이라고 간단히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당연히 ‘물음(問)’이지요. 물어서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는 것이 바로 ‘탐문’입니다.
동음이의어로 ‘탐문(探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또한 간단히 ‘수소문하여 들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당연히 ‘들음(聞)’입니다.
문(問)과 문(聞), 입(口)과 귀(耳), 묻는 것과 듣는 것―. 확실히 다르지요?
한데, 비록 뜻은 달라도 어쨌거나 이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태입니다.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둘은 의미가 없는 사태일 수도 있습니다. 물었는데도 답을 들을 수 없다면, 참 딱한 일 아니겠습니까. 기브 앤드 테이크, 묻고 답하기―.
제가 ‘탐문’이라는 말을 걸고넘어지는 것은 이 말이 ‘인터뷰’라는 말과 이음동의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사전은 한자어인 ‘탐문’에 대해서는 참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풀이해 놓은 반면, ‘인터뷰’라는 말은 ‘조사·진단·시험·취재 따위를 목적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라고 퍽도 거창하게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터뷰’도 결국은 ‘더듬어 찾아가 묻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인터뷰를 하든, 탐문을 하든, 그 행위의 목적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터뷰 다큐멘터리와 탐문수사
영화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인터뷰는 역시 다큐멘터리하고 가장 가까운, 또는 사이가 좋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인터뷰만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의 배경을 파헤친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Shoah)〉(1985)는 장장 아홉 시간에 이르는 굉장한 ‘인터뷰 다큐’ 아닙니까. 거기서 인터뷰는 ‘진실 규명’을 위한 방법이요 수단입니다.
물론 인터뷰가 반드시 진실 규명을 위한, 또는 진실 규명에만 이바지하는 방법이요 수단인 것은 아닙니다. 흔히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숱하게 이용 또는 활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인터뷰는 곧잘 진실 규명보다는 인터뷰를 당하는 자, 곧 ‘인터뷰이’의 자기변명이나 위장(僞裝), 또는 자기 PR을 위한 효과적이고도 실용적인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의식적으로 진실 규명을 위해서 쓰일 때만 인터뷰는 진실 규명을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악용될 소지가 있으니, 진실 규명을 위해서라면 인터뷰를 감행하는 ‘인터뷰어’의 선의지(善意志)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데, 진실 규명을 위해서 쓰일 때 인터뷰는 적어도 얼마간 탐문수사의 모양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사가 피의자한테서 중요한 증언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서 질문을 하듯이 조목조목 날카롭고 집요하게, 때로는 의뭉스럽게 에둘러 말을 걸어서 원하는 진실의 답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또 진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몇 퍼센트의 진실인지를 질문자는 그저 질문을 던지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경찰에서 피의자를 대상으로 똑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던지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바로 이런 까닭에서일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효과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진실을 숨기려는 피의자가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을 수없이 반복해서 하는 과정에서 어느 대목에선가는 반드시 틈을 보이게 마련이고, 그 틈을 통해서 형사는 진실의 편린을 힐끗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이 경우의 탐문수사는 사전적으로 ‘심문(審問:자세히 따져서 물음)’이나 ‘신문(訊問:캐어물음 또는 법원이나 수사 기관 같은 데서, 증인이나 피고인 등을 불러다 놓고 구두로 캐어물어 조사하는 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의미상 서로 비슷한 과정이라고 느껴집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전의 풀이들 사이에 무슨 의미의 차이가 있는지 확실하게 구분되는 느낌은 아니지만요.
그러니까 진실 규명이라는 차원에서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와 경찰 수사의 ‘탐문’은 서로 동족 관계인 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터뷰와 추리소설
진실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탐문이라는 뜻으로 인터뷰라는 말을 쓸 때, 추리소설은 바로 이 인터뷰라는 방식에 스토리 전개의 거지반을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주인공이 탐정이든 형사든, 또는 그 비슷한 구실을 하는 어떤 다른 인물(예컨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 나오는 물리학 교수)이든,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사건의 어느 단계에서는 반드시 인터뷰 방식의 도움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인사건이라면, 사건 현장에서 어떤 물리적인 단서를 찾아낸다든가, 시체를 부검하여 무언가를 알아낸다든가, 또는 피살자가 죽어가면서 남겨놓는 ‘다잉 메시지(또는 다잉 사인)’를 통해서 범인의 정체를 추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범인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방법이 있겠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그런 방법으로만 진범을 밝혀내고 체포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수사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인터뷰와 추리소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야베 미유키의 역작 《이유》도 어쨌거나 추리소설이니까 인터뷰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데,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인터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도무지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화로 치면, 그야말로 〈쇼아〉에 필적할 만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지 싶습니다. 그 정도로 《이유》는 철저한 ‘인터뷰 추리소설’이라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인터뷰와 진실
추리소설인 만큼 당연히 《이유》에서 이야기의 흐름은 추리소설의 정석인 ‘진실을 향한 접근’의 과정을 그대로 따릅니다. 다만, 그것은 형사나 탐정의 활약이 아니라, 한 잡지사 기자의 인터뷰라는 점이 독특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유》는 ‘오로지’ 인터뷰입니다. 첫 번째 챕터를 읽는 동안 드는 낯선 느낌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건을 둘러싼 온갖 인물들, 그러니까 피의자는 물론이고, 피해자와 형사, 그리고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동네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 잡지사 기자, 곧 ‘인터뷰어’는 수많은 ‘인터뷰이’들과 벌이는 인터뷰를 통하여 진실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끈질기게 나아갑니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지금 《이유》의 인터뷰어는 형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시점은 이미 사건은 끝난 뒤입니다.
하긴, 범인이 밝혀지고 체포되어 사건이 완전히 종결된 뒤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집요한 인터뷰가 무사히 이루어지도록 경찰에서 가만히 내버려 둘 턱이 없겠지요.
한데, 이 일종의 ‘사후 인터뷰’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경찰의 수사가 밝혀내지 않은(또는 못한) 더욱 깊은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제삼자의 처지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껏해야 TV 뉴스를 보거나, 신문 사회면 기사를 읽는 선에서 그 내막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제삼자의 처지에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사건의 깊은 내막이, 그것도 수사를 담당한 형사들조차 알아내지 못한, 또는 알아낼 수 없었던 저 깊고 깊은 진실이 이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의 관심은 범인을 잡는 것뿐이니까요. 범인을 잡는 것과 진실을 밝히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유》가 의미 있는 이유
《이유》는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건의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깊디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 좀처럼 밝혀내기 힘들 뿐만이 아니라, 밝혀낸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기까지 한 ‘진짜 진실’을 드러내는 데 얼마나 쓸모 있는 방식인가를 가슴이 섬뜩하리만큼 철두철미하게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이유》를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도대체 한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 체포하는 것을 가리켜 어째서 ‘해결’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정말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범인을 잡는 것은 그저 잡는 일일 뿐,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 근본 문제의 규명이나 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범인 체포’일 뿐, 결코 ‘사건 해결’ 또는 ‘문제 해결’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유》가 남다른 의미를 갖춘 추리소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유》는 누가 범인인지, 범인이 무슨 까닭으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 데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관심이 있는 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추리소설이니까 그것도 필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유》가 줄기차게 달려가는 곳은 ‘범인’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에서라면 결코 등장하지도 못했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인물들까지 인터뷰이로서 당당히 내용의 한 챕터씩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유》는 얼마나 많은 사정(事情)과 사연과 이유와 원인과 동기와 사람들이 한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하나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지를, 하나의 살인사건이 얼마나 많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작용한 결과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한갓 추리소설인데도 《이유》가 발자크의 문학에 비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이 일을 해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인터뷰라는 것은 정말 가공할 만한 진실 규명의 수단일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 소설에서처럼만 구현해 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