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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5. 기차를 타고 밤하늘을 나는 상상력

–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by 김정수

B25. 기차를 타고 밤하늘을 나는 상상력 / 《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

하라 케이이치의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2008)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2008)와는 또 다른 귀여운 매력으로 가득 찬 애니메이션입니다. 누가 저한테 ‘갓파 쿠’와 ‘포뇨’,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온다면 글쎄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데, 이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의 중반부쯤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인,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갓파 쿠를 집에 데려와 돌봐주고 있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고이치가 수영장에서 학교 친구인 여자아이 키쿠치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짤막한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갓파 쿠의 존재가 매스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바람에 고이치는 학교 친구들한테서 질시와 오해를 받고 있는 곤란한 처지입니다. 그래서 거의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지요. 덕분에 수영장에서도 혼자 외로이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이 키쿠치가 고이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상황입니다.

키쿠치 또한 학교에서 고이치와 비슷한 처지입니다. 실은 더 안 좋은 상황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둘 사이에는 동병상련에 가까운 감정이 오갑니다.

처음에는 고이치네 개를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키쿠치가 문득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고이치는 ‘토오노’에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키쿠치는 그럼 ‘하나마키’에도 가봤느냐고 묻습니다. 고이치는 기차를 갈아타느라고 잠시 거쳤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마키가 뭔데 그러느냐고 키쿠치한테 반문하지요.

이때 키쿠치가 하는 말이 핵심입니다. ‘하나마키’가 바로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고이치가 다시 묻습니다.

“좋아하니? 미야자와 겐지.”

소녀는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응. 좋아해.”

살짝 놀라는 눈치의 고이치―.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은 집에서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제목의 책을 표지가 위로 오게 하여 펼쳐놓은 채 낮잠을 자고 있는 고이치와 가족의 모습입니다. 아마 고이치가 독서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겠지요.

이때 그 책 제목 밑에 쓰여 있는 저자 이름이 보이는데, 바로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입니다.


오에 겐자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은,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나의 나무’ 아래서》(송현아 옮김, 까치)는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입니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매우 교훈적입니다. 그렇다고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넘겨짚는다면 오산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에 겐자부로의 역량이 걸려 있습니다.

어쨌거나 대상 독자가 어린이이므로 그가 쓴 글치고는 제법 쉬운 말들을 동원하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입니다. 그래도 무작정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 또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역시 어린이들이 동화책 읽듯 술술 읽어내기는 다소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아무리 어려워도 열심히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하여 어린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효과는 분명히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이런 난맥상은 오에 겐자부로 자신도 이미 느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애초에는 초등학교 상급생들이 읽을 것들을 생각했지만, 이미 고등학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서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 책이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계속 말합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글들이 유치하다고 느끼거나, 반대로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다양하게 생각하지는 않나요? 실제로 나는 그런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줄곧 어른을 위한 책을 써왔고, 게다가 현장 교사의 직무를 해보지 않았던 나의 결점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매우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오에 겐자부로답습니다.

한데,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문장이 저의 흥미를 몹시 강렬하게 자극했습니다. 이것입니다.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위대함이 절실해집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오에 겐자부로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일컬은 작가를 이 미야자와 겐지 말고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미야자와 겐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은하철도 999

예전에 EBS TV에서 오랜만에 다시 방영해 준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를 역시 아주 오랜만에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그림체는 다소 거칠고 고색창연해 보였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어떤 절박한 정서는 21세기인 지금도 제 가슴에 와 닿는 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무렴, 과연 명작은 명작이다, 싶었지요.

일본 영화에서 기차가 얼마나 중요한 정서적 장치인가는 후루하타 야스오의 〈철도원〉(2000)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2008)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돌이켜 보면, 제가 기차라는 즉물적인 교통수단에 대하여 난생처음 강렬한 감흥과 매력을 느낀 것은 역시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를 통해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땅 위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발상은 단순한 기발함을 넘어서 가슴 벅찬 싱그러움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애꾸눈 선장’이라는 호칭으로 더 익숙한 ‘하록 선장’이 전함을 타고 우주를 날아다닌다는―실은 날아다닌다기보다는 떠다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느낌이지만요―발상보다 기차가 하늘을 난다는 상상력 쪽에 어쩐지 저는 더 마음이 끌립니다.

역시 기차의 매력이 배의 매력보다 더 크기 때문인가 봅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한데, 이 〈은하철도999〉가 단 한 편의 동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미야자와 겐지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과정을 통하여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미야자와 겐지가 쓴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동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의 우주를 비행하는 ‘은하철도’라는 유니크한 아이디어가 바로 이 한 편의 동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아마도’ 유일하게 ‘위대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여 일컬은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입니다.


기차를 타고 하늘로

《은하철도의 밤》은 일종의 판타지입니다. 당연하지요. 기차가 하늘을 나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SF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은하철도의 밤》은 〈은하철도 999〉와 궤를 달리합니다. 물론, 한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점과 소년의 가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설정에서 정서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겠지요.

하긴, 《은하철도의 밤》의 소년은 병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은하철도 999〉의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 기차를 타고 멀고 먼 여행을 떠납니다.

이로써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에 왜 하필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 등장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 구조를 기준으로 굳이 견줄 대상을 찾는다면 《은하철도의 밤》은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판타지 소설 《오즈의 마법사》(1900), 또는 빅터 플레밍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와 비슷합니다. 한 소년의 꿈 이야기니까요. 그 꿈속에서 소년은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사건들을 겪습니다.

한데, 이 ‘은하철도’라는 발군의 아이디어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의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이 은하철도를 타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승객도 끼어 있습니다.

코나카 카즈야의 〈미래를 걷는 소녀〉(2009)에도 똑같은 사건이 나오는데, 아마 그 시대에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1912년 4월 14일~15일)은 전 세계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문명에 대한 근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아니었을까도 싶습니다.

심지어 이광수도 1917년 《청춘》 지에 발표한 그의 단편소설 〈어린 벗에게〉에서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의 묘사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에도 그 소식이 널리 알려져서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미야자와 겐지가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동화의 초고를 쓴 것이 바로 그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 동화를 그는 생전에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1896년에 태어나 마흔을 다 채우지 못하고 193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그런 빛나는 아이디어가 통하지 않던 시대를 살다 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문예사적으로 당시는 리얼리즘 전성시대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판타지류가 설 땅은 매우 비좁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었던 셈이지요.

그 삶의 궤적을 훑어봐도 가슴을 저미는 구석이 있습니다.

애초부터 불교, 구체적으로는 《법화경(法華經)》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등학교 교사인 여동생이 일찍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고 더욱 불교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면이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녹아 들어가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후 그는 고향에 내려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직접 농작물을 가꾸는 생활을 시작하였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홀로 살며 농민의 지도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고향을 풍요로운 농촌, 일종의 유토피아로 만들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시대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을 무색하게 하며,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전쟁을 향해 저돌적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급성폐렴에 걸려 세상을 뜹니다.

작품에 이르면 안타까움은 더합니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것은 시집 하나와 동화집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것도 자비출판이었지요.

그런 그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고,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게 된 것은 그가 기차를 타고 저 멀리 하늘로 영원히 떠난 지 무려 60년이나 지나서부터였습니다. 음악으로 치면 ‘미완성 교향곡’의 프란츠 슈베르트 같은 삶이었다고 하면 될까요. 그의 영전에 다소곳이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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