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률, 〈망종〉
C13. 산산이 부서진 여인 – 장률, 〈망종〉(2005)
황량하고 고요한 풍경 속의 삶
풍경이 황량하고 고요합니다.
정서적으로 황량한 쪽이 더 강한지, 고요한 쪽이 더 강한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듭니다.
황량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황량합니다.
또는, 황량한 만큼 고요하고, 고요한 만큼 황량합니다.
시종일관 그렇습니다.
한데도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것인 이 풍경은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낯설지 않기에 그저 황량하고 고요하다고 규정해 버리고 말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남습니다.
우리의 유소년 시절, 그 오래된 기억의 갈피를 번거롭게 들춰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볼 수 있는 기회가 부쩍 늘어난 옛날 한국 영화들에는 이런 황량하고 고요한 풍경이 드물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 이미지 그대로를 눈으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지요.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1960년대 이전의 흑백영화들에서보다는 차라리 1970년대의 색채영화들에서 이런 성격의 풍경은 더욱 확연합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의 그 시대와 중국의 지금 사이에, 또는 그 시대의 우리와 지금의 중국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탓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지금’이란 이 영화가 만들어진 무렵, 또는 영화 속의 시점(時點)을 가리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정치경제학 용어를 끌어다 쓸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그저 사람이 숨 쉬고 먹고 자고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든 국면, 그러니까 바로 그 ‘살이’라는 국면의 공통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그랬듯이, 지금 중국이 그런 것입니다. 그 시절 우리의 삶이 그랬듯이, 지금 중국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 속 시점의 삶이 말입니다.
조선족 여인이 주는 울림
하지만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아무리 낯설지 않다고 해도, 그 황량함과 고요함은 결국 남의 것입니다.
남의 것이기에 강 건너 불구경의 차원에 머무르기 십상이지요.
강 이편에서 강 저편의 불난리를 아무리 걱정하고 애태운다고 한들, 강 이편에 있음으로써 나 자신은 그 화마(火魔)의 손길로부터 안전하다는 의식을 무슨 수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나는 한갓 구경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황량하고 고요한 풍경 속 주인공이 다름 아닌 조선족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생판 무관한 남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부르짖는 시대에 난데없이 이 무슨 고루한 혈족주의냐고 힐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여인이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조선족이 아니라면 도저히 맛보기 힘든 깊은 감정의 울림이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는 특히 그 조선족 여인의 모습에서 신산스러웠던 지난 세월, 저 도저히 측정할 길이 없는 강렬한 모성과 초인적인 희생으로 자식들을 돌보고 가족을 지켜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가슴 저린 잔영이 엿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그 여인의 신상 정보와 행태를 설명하자마자 단박에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신파가 아닌 신파
여인의 이름은 최순희. 조선말을 쓰고, 김치 행상으로 홀로 어린 외아들을 키우며 살아갑니다.
남편은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고,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객지에서 그녀의 처지는 그녀가 속해 있는 풍경만큼이나 황량하고 외롭고 막막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그 와중에서도 말 안 듣는 어린 아들을 붙잡고 집요하게 한글을 가르치고자 애쓰는 것은 민족의식과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짜 그대로 실존적인 행위처럼만 보입니다.
아들을 상대로 하여 그런 닦달질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그 고단한 삶을 도대체 무슨 수로 견뎌내겠나, 싶습니다. 그 닦달질이 아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은 이쯤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필시,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초반부에서부터 지체 없이 관객의 가슴을 후벼 파는 신파 설정을 들이밀어 벌써 족히 두어 번 정도는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인공도 조선족이요, 그 조선족 여인을 연기한 배우도 조선족이요, 그 여인과 가장 진한 감정의 교류를 맺는 사내도 조선족인 것으로도 모자라 감독마저도(또는 감독부터가) 조선족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파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합니다.
말로만 설명하면 온전한 신파인데, 실제 영화는 전혀 신파가 아닌 것이지요.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기이한 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미학적 특성이자 특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구한 여인
글이란 이런 국면에서 도저히 영화의 적수가 못됩니다.
그래도 글인 이상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보여줄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녀 최순희의 삶은 기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선, 그녀는 중국 내 소수민족이라는 태생적인 불리함을 천형처럼 안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세상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인 남편은 중죄를 지어 기약 없는 옥살이를 하는 중이지요.
그러니,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수시로 들이닥치는 단속반의 눈치를 늘 살펴야 하는 무허가 김치 행상을 하며, 어느 천년에 사람 구실을 하게 될까 싶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그녀의 처지는 그야말로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은 어디에서나 약한 자에게 더 불인(不仁)한 법인지, 그녀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 특히 사내들한테서 그녀는 거듭 배신을 당하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습니다.
이 정도면 아들과 함께 쥐약(!)이라도 먹고 동반자살을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요.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혹한 운명
마지막으로 운명은, 제발 그러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관객의 소망을 산산이 부수며, 가차 없이 그녀의 아들에게 손을 댑니다. 과연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어처구니없는 불행의 국면이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이 팔자 기구한 조선족 여인이 최후의 순간 감행하는, 그 도무지 상상을 불허하는 엽기적인 복수의 행위가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감독은 전혀 신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 느닷없는 복수극을 관객에게 설득해 내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하지만 보리밭 너머로 실성한 듯 한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줄기차게 따라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복수의 후련함이나 충격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것은 버티다 버티다 마침내 산산이 부서진 한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렇게 부서진 그녀의 파편들이 넓디넓은 공간 속으로,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흩어져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지요.
그 모습을 목도하는 우리는 숨쉬기가 힘들 만큼 가슴이 저립니다.
이 가슴 저림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허무인지, 충격인지, 당황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절망이나 좌절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가슴 저림을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놀랍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