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이 슌지, 〈하나와 앨리스〉
C12. 사랑의 진면목을 체험한 소년의 성장담 – 이와이 슌지, 〈하나와 앨리스〉(2004)
조작된 기억의 사랑
조작된 기억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또는 조작된 기억도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나아가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 사랑의 감정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와 앨리스〉는 바로 이런 ‘이상한’ 질문들에 기초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 또한 앨리스나 하나가 아니라, 이 두 소녀가 사랑에 빠져드는 대상인 선배 미야모토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요컨대, 이 영화를 두 소녀의 관점과 처지에서가 아니라, 미야모토의 관점과 처지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이상한 질문에 직접 결부된 인물이 바로 미야모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각으로 뜯어보기
영화가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명실상부한 주인공을 무시하고, 그 주인공의 그늘에 숨어 있는 다른 등장인물―조연이든 단역이든―의 시각과 처지에서 그 영화의 이야기 자체를 재검토하는 것은 영화의 숨은 의미―어쩌면 감독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를 읽어내기 위한 제법 효과적인 방법, 또는 독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소설처럼 다양한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낱낱이 상세하게 다루기에는 다소 곤란한 측면이 있는 영화의 특성상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의 사정이 상당 부분 생략되거나 축소되고, 심지어는 왜곡되기도 하는 것은 어느 만큼 속절없는 노릇이기는 하겠지요.
따라서 조금이라도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뜯어보고 싶다면 그 다른 인물들한테 짐짓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한번 그렇게 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영화는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이런 방식의 독법은 해당 영화의 내용을 한층 더 깊고 넓게 하여 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급기야는 관객이 삶의 진면목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비결의 하나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모든 영화에 일방적으로 이런 독법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하나와 앨리스〉의 경우에는 이 독법이 매우 효과적이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거짓말이 빚어낸 사랑의 죗값
그래도 우선 이 영화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야기 구조를 존중하여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 영화는 하나와 앨리스라는 두 단짝 고등학교 새내기 소녀들이 같은 학교 한 학년 위의 남자 선배 미야모토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일종의 삼각관계에 해당하는 연사(戀事)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관계가 삼각관계가 된 연유, 다시 말하면, 그렇게 사이좋던 하나와 앨리스가 졸지에 서로 연적(戀敵) 관계로 발전해 버린 사정입니다.
여기에는 단 한 차례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 빚어낸 거대한 허위와 사기의 담합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미야모토로서는 차라리 음모라고나 해야 할 이 담합에 애꿎게 걸려든 죄밖에 없는 셈인데, 문제는 이 죗값으로 치러야 할 상처에서 그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사랑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피할 수 없는 미야모토 자신만의 죗값입니다.
거짓말을 할 기회
모든 것은 하나(스즈키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맨 먼저, 미야모토(카쿠 토모히로)에 대한 하나의 짝사랑이 있었습니다.
짝사랑의 쌍방은 언제나 관찰하는 쪽과 관찰당하는 쪽으로 나뉘게 마련이지요. 하나는 늘 미야모토를 관찰하고, 미야모토는 늘 하나에게 관찰당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저 가슴만 졸이는 하염없는 관찰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미야모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포착할 것을 목적으로 한 관찰입니다.
기회란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한테 찾아오는 법이지요.
마침내 어느 날, 미야모토가 길을 가다 덜 닫힌 문에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져 잠시 혼절하는 뜻밖의 사건이 생깁니다. 몰래 그를 뒤따르던 하나는 마침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그에게로 달려 가지요. 그리고 하나는 이윽고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뜬 그를 지금 서로 사귀는 사이인 자신을 못 알아보는 기억상실증 환자로 몰아붙이는 기상천외한 재치를 발휘합니다.
미야모토는 어리둥절한 채로 졸지에 제 여자친구인 하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신세가 된 셈입니다.
거짓말의 연쇄
하지만 여기서 정작 놀라운 것은 하나의 당돌함이라기보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덜컥 속아 넘어간 미야모토의 멍청함 혹은 순진함입니다.
도대체 미야모토는 어떻게 생겨 먹은 위인이기에 여자 후배한테 그토록 수월하게 속아 넘어간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 영화의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 순전히 미야모토의 그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멍청함, 또는 순진함 덕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거짓말은 또 다른 필요한 거짓말을 낳는 법 아닙니까.
이 거짓말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는 단짝 친구 앨리스(아오이 유우)를 일종의 도우미로 이 거짓말에 동참시키는 수를 씁니다.
미야모토가 하나와 만나기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의 역할을 앨리스에게 떠맡긴 것이지요. 앨리스는 친구의 제안에 기꺼이 응합니다.
거짓말이 진짜가 될 때
기이한 것은 모든 것이 허구인 이 담합, 또는 작당 속에서 미야모토가 진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애초 있지도 않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쓰던 미야모토의 가슴속에 진짜 사랑의 불이 지펴진 셈이지요.
기왕에 미야모토를 기억상실증 환자로 몰아붙일 때 하나한테 구체적으로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미야모토가 잠시 의식을 잃은 상황이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듯이, 하나의 기억상실증 아이디어도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마련할 여유가 전혀 없는, 갑작스러운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럼으로써 미야모토에 대한 기약 없는 짝사랑을 사실상의 연인 관계로 바꾸어보고자 하는 소망은 있었겠지요. 일종의 국면 전환용 아이디어라고 하면 될까요.
그래도 미야모토가 진짜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까지 하나가 믿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긴 그 정도로 순진한 소녀가 그토록 과감한 재치를 발휘할 수 있을 턱이 없겠지요.
그러니, 하나는 결과적으로 애초의 소망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올리게 된 셈입니다.
문제는 미야모토가 사랑을 느낀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 앨리스라는 점입니다. 세상에!
미야모토는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이미 헤어진 과거의 여자친구한테 새삼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셈입니다. 물론 이 두 여자친구는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지요.
사랑의 잠재력
하나가 앨리스와 연적 관계가 되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입니다.
이야기가 미야모토를 ‘방치한’ 채 하나와 앨리스 사이의 불화와 화해를 넘어선 발랄한 성장담 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틀어잡고 나아가는 것도 여기서부터지요.
따라서 관객으로서 우리는 이제부터 ‘방치된’ 미야모토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미야모토의 처지에 섰을 때 비로소 〈하나와 앨리스〉를 사랑이라는 감정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고찰하는 영화로 해석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절없이 이렇게 자문하게 됩니다.
있지도 않은 기억만으로도 지펴지는 것이 사랑이라면, 도대체 사랑이란 얼마나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 것인가, 하고요.
하여, 이런 해괴한 체험의 직접 당사자인 미야모토의 성장담이야말로 두 소녀의 성장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