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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Dec 20. 2024

C11. 지구 멸망에 관한 즐거운 농담

  - 가스 제닝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C11. 지구 멸망에 관한 즐거운 농담 – 가스 제닝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

인류의 멸망, 지구의 멸망

   지구 멸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SF지요.

   지구 멸망에 관한 상상은 핵무기가 등장한 뒤로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나 노아의 홍수처럼 죄 많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이 멸망은 지구 위에 사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그 지구 자체의 물리적인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파괴의 능력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제 인간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터전까지도 파멸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공할 만한 일이지요.

   그럼, 그 능력을 충분히 통제만 한다면 적어도 자멸의 길만은 피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요, 탐욕과 욕망으로 덩어리진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의 자기 통제력이 신뢰할 만한 것일 턱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정능력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이 무도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굳이 핵무기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멸망은 필연일 것입니다.


끔찍한 농담, 즐거운 농담

   인간의 온갖 욕망을 드라마의 구성 원리, 또는 주요 요소로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영화라는 매체가 이 멸망의 테마에 주목하지 않을 까닭이 없지요.

   그렇다면 테마가 지구 멸망이니 영화가 대단히 심각하고 우울한 정서로 가득 차 있으리라고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오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영화는 지구 멸망에 관한 ‘즐거운 농담’입니다. 그래서 볼 만합니다. 아니, 즐길 만합니다.

   인류 멸망, 또는 지구 멸망을 테마로 다룬 기존의 영화들은 대체로 슬프고 암담합니다.

   〈패튼 대전차군단〉(1970)과 〈빠삐용〉(1973)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고전적인 SF영화 〈혹성 탈출〉(1968)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었지요.

   우리는 해변에 처박힌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찰턴 헤스턴의 그 절망적이고 참담한 심경에 감염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롭지요. 농담이라면 아주 ‘끔찍한 농담’인 셈입니다.


잊기 쉬운 농담, 잊기 어려운 농담

   하지만 아무리 끔찍해도 그것이 농담인 이상 잊을 수 있다고, 잊으면 그만이라고 자신해서는 곤란합니다. 왜요? 농담이되 ‘끔찍한’ 농담이니까요.

   끔찍한 농담은 잊기 힘듭니다. 이거야말로 영화가 노리는 극적 효과 아니겠습니까.

   이 끔찍함이 우리에게 반성을 종용합니다.

   그래서 ‘끔찍한 농담’은 곧잘 ‘끔찍한 진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가 바로 이 ‘끔찍한 진담’ 계열에 속하는 매우 인상적인 사례였지요.

   〈지구를 지켜라!〉는 지구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맙니다.

   지구는 그야말로 희망 없는 행성입니다. 그래서 숫제 날려버리지요. 암담합니다.

   그 처절한 이미지를 잊고 싶은데, 잊을 길이 없습니다.


반가운 농담, 기약 없는 여행

   그래서 ‘즐거운 농담’이 반가운 것입니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팀 버튼 감독의 〈화성 침공〉(1996)이라는 멋진 선례가 얼른 떠오릅니다.

   지구를 침공한 화성인들(또는 화성의 괴물들)을 ‘노래(歌)’로 물리친다는 그 어처구니없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정말 ‘즐거운 농담’으로서 손색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화성 침공〉은 그래도 지구 자체의 물리적인 파괴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일찌감치 지구를 날려버리고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가릴 여유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그렇게 시작합니다.

   지구 자체가 없어져 버렸으니, 살아남은 이들은 새로이 정착할 곳을 찾아 졸지에 우주를 기약 없이 여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바로 이 여행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행이 즐겁습니다.


농담 즐기기

   관객으로서 이 여행은 고스란히 농담을 즐기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는 어쩐지 안 보아도 고약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드넓은 사막에서 기약도 없이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사람의 딱한 신세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헤매기는 전혀 우울하지도 비장하지도 신산스럽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즐겁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코미디인 탓이지만, 무엇보다도 지구 멸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나 철학적 고뇌 따위에 거의 전혀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심각한 고민의 정서는 이 영화와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삶의 문제와 관련한 궁극적인 질문에 슈퍼컴퓨터는 그냥 심드렁하게 ‘42’(!)라고 대답하고 맙니다.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농담인 것이지요.

   영화는 이런 농담으로 시종일관합니다. 이 점을 미리 알아차리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런 농담을 즐길 요량이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철거(!)라는 농담

   한데, 참 희한하게도 바로 이 농담 속에 뼈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계열의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지구의 멸망은 외계인의 손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구가 ‘하필이면’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초공간 우회로’가 지나가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철거(!)를 한다는 기상천외한 명목입니다. 우주의 질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멸망도 파괴도 아닌, 철거라니요?! 지구인으로서 완전 자존심이 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농담인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지구는 가차 없이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나 즐거운 농담인 이상 영화가 비극으로 끝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복제(!)라는 농담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 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얻습니다. 그게 또 해괴합니다.

   지구 자체가 고스란히 복제(!)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집도 사람들도 예전 그대로지요.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 지구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던 지구가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은하계를 여행한 다음에 얻은 지구입니다.

   모양새는 똑같아도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의미를 이 영화는 지금까지 줄곧 농담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 것입니다.


교훈, 그 즐거운 농담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구를 지켜라!〉가 끔찍한 진담으로서 교훈을 강제하는 ‘체벌’의 영화였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즐거운 농담으로서 교훈을 설득하는 ‘타이름’의 영화라고요.

   여기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개미》에서처럼 지구의 주인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인식이 바탕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전언을 따르면, 인간은 생쥐와 돌고래에 이어 고작 ‘넘버3’(!)에 불과한 존재일 뿐입니다.

   영화는 그런 하잘것없는 인간이 지구를 제 마음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우리가 이 메시지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을 즐거운 농담의 방식, 농담의 모양새로 전달받은 덕이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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