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백스물한 개의 돌계단
24. 백스물한 개의 돌계단
돌계단이 몹시 가팔라 보인다. 아득하다. 왼쪽에 새로 설치한 난간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한데도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알겠다. 계단 이쪽저쪽의 집들과 담장의 모습이 달라졌다. 새로 지은 집들, 새로 쌓은 담장들. 그러니 바뀐 것은 계단이 아니라, 계단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언젠가는 이 둘레의 풍경처럼 모습이 바뀌거나 최악의 경우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따위는 계단 어느 구석에서도 엿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세월이 얼마가 더 흐르든 이 계단만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언제까지고 꿋꿋이 남아줄 것 같다. 그 생각이 이상하게 나를 안심시킨다.
하나, 둘, 셋……. 나도 모르게 눈으로 계단의 수효를 세기 시작한다. 이내 멈춘다. 계단을 끝까지 다 오르려면 정확히 백스물한 걸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세어본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아직 집을 떠나지 않았던 시절. 아직은 집을 떠날 수 없었던 시절. 갑갑할 때마다, 암담할 때마다, 그래서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이리로 오곤 했다. 한 단 한 단 세면서 걸어 올랐다. 또는, 오를 때마다 셌다. 무슨 주문을 외듯이, 기도문을 읊조리듯이. 그러니 계단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면 백스물하나라는 숫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았다.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백스물한 개다. 계단의 아랫부분에도 저 꼭대기 윗부분에도 덧대거나 헐어낸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눈썰미를 믿는다.
지금 이런 몸 상태로 다 오를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잘 안다. 한데도 오르고 싶다. 이 마음을 접을 수 없다. 망설인다. 바람이 분다. 계단에는 언제나 바람이 많았다.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여름에는 후텁지근한 바람, 겨울에는 차디찬 바람. 지금은 아직 후텁지근한 쪽이다. 하지만 내 몸은 그걸 후텁지근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온전한 몸이 아니다. 사람들은 바람을 싫어한다. 애써 다듬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치마가 보기 흉하게 펄럭이니까. 게다가 백스물한 개나 되는 돌계단이다. 길고 높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 계단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 되고 말았다. 계단 중간중간에 돋아나 있는 잡풀들이 침묵으로 그걸 증언해 준다. 지금도 역시 한적하다.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계단을 통하지 않고 좀 멀지만 돌아서 가는 길이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주택가의 비교적 평탄한 골목길이다. 여기로 오면서 보니 깨끗하게 골목에는 모조리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차는 물론이고 이제는 사람도 다 그 길로 다니는 모양이다. 나는 그쪽으로 갈 생각이 없다. 지금 나는 계단 자체가 목적이다.
왼쪽은 낭떠러지고, 오른쪽은 담벼락으로 온전히 막혀 있다. 난간이 없던 시절 계단은 멋모르는 어린아이나 술 취한 어른이나 다리가 부실한 노인들한테 적이 위험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족 사고가 몇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직접 목격했다. 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어린아이였다. 옆에는 엄마인 듯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손을 잡고 오르다가 어느 순간 아이가 엄마 곁을 떠났다. 엄마가 어째서 아이의 손을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일인지 잠시 한눈을 파는 것도 같았다. 나는 밑에서 막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고, 그들은 여든 번째에서 아흔 번째 계단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아이가 아장아장 낭떠러지 쪽으로 걸었다. 거기까지 엄마를 따라 계단을 자기 두 다리로 걸어서 올라갔다면 이제 어지간히 지쳤을 법한데도 아이한테서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계단에는 아직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상한 쪽은 아이의 엄마였다. 낭떠러지를 바라고 걸어가는 아이를 엄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가 여전히 한눈을 팔고 있었다면 나는 그 아이가 지금 위험하다고 소리쳐 알려주었을 것이다. 엄마의 눈길은 분명히 아이 쪽을 향해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마 곧 달려가 아이를 붙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엄마는 물끄러미 구경만 했다. 나도 멍하니 구경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주 짧은 순간 뇌기능이 정지한 것 같았다. 아이는 소리 없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부드러운 솜뭉치인 듯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낭떠러지 저 밑바닥에 그냥 사뿐히 내려앉았다.
내가 엄마의 비명 소리를 들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어쩌면 고막을 찢을 듯한 그 날카로운 비명이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저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 휘청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달려 내려와 아이가 떨어진 곳으로 내달았다. 나는 처음에는 아이를, 이번에는 그 아이의 엄마를 물끄러미 구경했다. 엄마는 아이를 안아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뛰어갔다. 나는 얼어붙은 듯 계단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엄마의 발소리는 그 모습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동안 더 이어졌다. 그때 계단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한데도 소문은 곧 동네에 널리 퍼졌다. 아이가 떨어진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서서 웅성거리는 것을 그 뒤로 여러 차례 보았다. 난간은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설치되지 않았다. 계단은 차츰 버림받았다. 폐쇄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외려 그래서 더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속으로 가늠해 본다. 잘 모르겠다. 계산할 수 없다. 평지가 아니다.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내 다리가 얼마나 버텨줄까. 내 몸이 얼마나 견뎌줄까. 걷는 동작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져 있음을 느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온몸 구석구석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저 다리만 온전하다고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는다. 걸으면서 몸 여기저기에 손을 대본다. 옆구리에, 배에, 등허리에. 그리고 어깨에도, 가슴에도. 알겠다. 온몸의 근육이 조금씩 다 동원되고 있다. 몸은 가만히 있고 다리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다리도 몸도 다 함께 움직인다. 신기하다. 그러니 몸 어느 한 군데만 고장이 나도 걷는 동작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걷기는 달리 말하면 지체들의 합력, 그 온전한 결과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건 성경 구절이다. 핵심을 정확히 지적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그제야 든다. 무사히 걷자면 통증도 없어야 하고, 심장도 올바로 뛰어야 한다. 온몸의 동의와 협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저 다리만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니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몸이 그만큼 건강한 상태에 가깝다는 뜻이다. 적어도 건강한 상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 희망으로 새기고 싶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지점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을까. 멈추어야 할 곳을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을까. 그래서 마침맞게 자제할 수 있을까. 집까지 돌아갈 기력을 남겨두어야 한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곤란하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제때 도움을 받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휴대폰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있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싶었다. 휴대폰 하나조차도 무거웠다. 걷기를 방해할 만한 것은 되도록 몸에 지니지 않기로 했다. 지갑도 가져오지 않았다. 애초 이렇게 멀리까지 올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저 욕심일까. 다리가, 몸이, 내 폐가, 내 심장이 견뎌주었다. 이제 남은 기력이 얼마나 될지, 그걸 산출할 방도가 없다. 나는 아직 내 몸 상태를 정확히 모른다. 실제로 올라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문제다. 계산이 잘못되면 돌아가는 길에 자칫 힘에 부쳐 주저앉을 수도 있다. 불안하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꼭 한 번 시험해 보고 싶다.
의사는 나더러 당분간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일러주었다. 조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경고였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나는 이미 무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질문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없다. 의사의 말은 언제나 추상적이었고, 환자의 궁금증에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려 했다. 섭생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짜게 먹지 말고, 육류 섭취를 줄이라는 말 자체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할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평소 식성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다 보면 입맛을 잃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의사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지금 식욕을 많이 잃었다. 잘 먹히지 않는다. 애를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의사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내 몸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파악하고 있어도 내 몸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내 몸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무지한 것이 아닐까. 의사는 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더 좁히면 기껏해야 내 병증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그 환자가 겪을 법한 곤경의 구체적인 사례는 다 헤아릴 도리가 없다, 아무리 의사라고 한들. 그러니 나한테 적확한 답변이나 도움말을 애초 해줄 수가 없는 처지다. 그게 의사의 한계다.
의사한테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에는 환자 한 사람한테 허락되어 있는 시간 또한 턱없이 모자란다. 생각을 충분히 가다듬을 여유가 없다.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 말고도 수많은 환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터에, 의사 앞에 앉는 순간부터 환자는 벌써 쫓기는 마음이 된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환자를 사정없이 옥죄고 든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의사가 갑이라면 환자는 을이다. 의사는 공격하고 환자는 방어한다. 그뿐이다. 의사 앞에서 환자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판사 앞의 죄인이다. 얼어붙는다. 생각이 제때 떠올라줄 까닭이 없다. 떠오른다고 해도 그걸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저 감당 못 할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행운이 있기를, 적어도 불운하지는 않기를 소망할 수 있을 뿐이다. 환자한테 의사는 단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의사한테 환자는 수많은 대기자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처음 이 돌계단을 오를 때의 기억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아마 무거운 머리로 동네 골목을 여기저기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문득 이 계단을 발견했을 테고, 무턱대고 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힘든 줄 몰랐다. 몸을 혹사시키고 싶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에멜무지로 계단의 첫째 단 위에 한쪽 발을 올려놓는다.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시험해 보고 싶다. 어쩌면 생각보다 위태로운 모험일 수도 있다. 잘 안다. 그래도 오르고 싶다. 내 몸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도전해 보고 싶다. 벌써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