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내성적인 인간, 내성적인 장기
25. 내성적인 인간, 내성적인 장기
기억나는 것은 아카시아가 피는 계절의 어느 날이다. 이 계단을 다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아카시아 숲. 바위투성이의 산꼭대기까지 이르는 길 좌우 양편에 줄지어 늘어선 아카시아는 꽃향기가 짙었다. 세상 고민을 한순간에 다 날려버릴 만큼 진한 향이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바람도 거셌다. 아카시아 길로 들어선 순간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눈길을, 마음을, 영혼을 온전히 빼앗겼다. 비바람이 아니라 꽃바람이었다. 눈보라가 아니라 꽃보라였다. 사나운 빗줄기에 섞여 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이 사선을 그으며 기운차도록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 가져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내 두 손은 자유로웠다. 비를 맞고 싶었다.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계단을 오르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아카시아였다. 비바람, 꽃바람으로 내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전하게 젖어들었다. 빗물 섞인 아카시아 꽃잎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 안으면서 걸었다. 사정없이 휘몰아쳐 오는 그 아카시아 꽃잎 더미에 깔려 그만 숨지고 싶었다. 죽지 못할 값이라면 영원히 그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날마다 괴로웠다. 그 괴로운 날들 가운데 하루였을 것이다. 그뿐이다. 벗어나고 싶었다. 떠나고 싶었다. 다 버리고 싶었다. 가족이 싫었다. 징그러웠다.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떠날 방도가 없었다. 용기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배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내 지력은 빈약했다. 거기까지는 내 상상력이 미치지 못했다. 대책 없는 가슴앓이만 하염없이 이어졌다. 하여 나는 툭하면 집을 나서 계단을 찾았고, 계단을 다 오르면 내처 아카시아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바위투성이 산꼭대기가 나타났다.
탁 트인 시야가 나를 맞았다. 시원한 바람, 하늘, 구름, 바위, 숲, 꽃…….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맑은 날에는 멀리 곧추서 있는 남산 꼭대기의 길쭉한 타워까지도 똑똑히 바라다보였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폐가 세척되는 느낌. 때로 궂은날이면 벼락이 칠 때도 있었다. 무섭지 않았다. 그 벼락이 내 몸을 산산이 부수어놓기를, 갈기갈기 찢어놓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벼락은 야속하게도 언제나 나를, 내 몸을 비껴갔다. 벼락은 나를 망쳐놓을 뜻이 없는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두 번째 단에 다른 쪽 발을 올려놓는다. 내 몸이 성큼 위로 솟아오른다. 된다. 세 번째 단을 딛는다. 역시 된다. 또 바람이 분다. 등을 떠민다. 힘을 받는다. 문득 몸이 가볍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가슴이 뛴다. 신장은 내성적인 장기다. 조용하다. 은밀하다. 그래서 조용히, 은밀하게 망가진다. 우울질이다. 쉽게 상처받는다. 그러고도 내색하지 않는다. 늘 세심하게 돌보고, 잘 다독여야 한다. 이 경우만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틀리다. 소식은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야 흡사 심판처럼, 판결처럼, 파산선고처럼 날아든다. 문제가 생겨도 그걸 털어놓기 위해 결코 신장은 스스로 침묵을 깨지 않는다.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돌이킬 수 없다. 신장은 회복을 거부한다. 그 순간부터 더 나빠지지 않도록 다잡는 게 최선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장은 이미 마음을 너무 많이 상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진심을 담은 사과뿐이다. 미안해. 너를 너무 오래 방치했어. 알뜰하게 살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내가 나빴어. 용서해 줘. 신장은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소용없는 사과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이것이 그동안 참고 또 참아온 신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얼마나 쓸쓸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얼마나 암담했을까. 신장은 그 모든 마음의 고충을 남몰래 참고 견디느라 이제 완전히 지쳤다.
아버지는 나한테 사과한 적이 없다. 아직 나한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사과할 생각이 있기는 있는 걸까. 사과를 받고 싶다. 정중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사과여야 한다. 나는 신장이다. 나는 내 신장에 동질감을 느낀다. 나도 신장만큼이나 내성적이었다. 그래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망가졌다.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싫어했다. 내 담임선생님들은 결코 잊지 않고 꼬박꼬박 어김없이 가정통신란에다 이렇게 기록했다. 내성적입니다, 온순합니다, 얌전합니다, 의사표현력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작당하듯 그토록 하나같을 수 있었을까. 맞다. 그랬다. 나는 늘 겁에 질려 위축돼 있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모든 것이 무서웠다. 아버지가 지지해 주지 않는 아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기를 펼 수 없다. 진작에 알아야 했다. 스스로 나를 지켜야 했는데. 그러려면 떠나야 했는데. 다 버려야 했는데. 그리고 잊어야 했는데. 줄기차게 아버지는 나를 망치려 들었고, 어머니는 나를 지킬 힘이 없었다. 나는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유는 하나다. 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너무 오래 방치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견디는 것뿐이었다. 그러느라 나는, 내 몸은 시나브로,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 갔다.
역시 힘에 부친다. 나는 쉰 번째 계단과 예순 번째 계단 사이 어디쯤에서 더 오르기를 포기하고 그만 주저앉기로 한다. 무리한다는 느낌은 서른 번째 계단과 마흔 번째 계단 사이에서 이미 한 차례 있었다. 호흡이 거칠다. 땀이 난다. 정상적인 땀이 아니다. 식은땀에 가깝다. 이걸 진땀이라고 하던가. 어지럽다. 드러눕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여기는 집이 아니다. 누가 행여 이런 내 꼴을 보기라도 하면 대낮부터 술에 취하여서 되는 대로 거리를 뒹구는 부랑자쯤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남부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거나하게 술기운에 젖어 있다면 감각이 마비되어 부끄러움 따위 느끼지도 못할 텐데.
한때는 술이 현실의 괴로움을 잊는 유일한 처방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필사적으로 마셨다.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일 필요도 없었다. 거의 날마다 해만 지면 함께 어울려 술집으로 몰려갔다.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는 친구들, 선배들이 늘 있었다. 나중에는 벌건 대낮에도 캠퍼스의 후미진 구석 자리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술 체질이 못 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한두 번 마셔보면 금세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래도 마셨다. 내 주량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덕분에 두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갔다. 몸이 보내오는 위험신호를 나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마셨던 셈이다. 곧잘 끼니를 걸렀고, 먹더라도 죄다 험하고 거친 싸구려 음식들이었다. 그 탓에 몸이 많이 상했으리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한 마디로 자학의 세월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그때는 젊은 혈기로 버텼다. 버텨졌다. 시대 상황이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돼주었다. 독재정권을 끝장내자는 구호는 매력적이었다. 힘껏 저항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떳떳하게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저항에 나는 내 속 깊은 괴로움을 몽땅 얹었다. 아니, 떠넘겼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길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 길에서 끝장을 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게 맞다. 나는 여전히 겁이 많았다. 그런 건 노력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술기운에 잠시 잊을 수 있을 뿐이다. 겁쟁이는 영원히 겁쟁이일 수밖에 없다는 자조가 나를 괴롭혔다. 투사로서는 자격 미달이라는 의식. 나는 충분히 반항적이지 못했다. 그게 내 본성이었다. 타고난 것이든, 만들어진 것이든. 달리 말하면 나는 주제 파악을 정확히 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해 연말,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졌고, 나는 그들과 멀어졌다. 그 또한 좋은 변명거리였다. 우리와 그들. 이 두 호칭 사이에 놓인 엄정한 거리. 글쎄, 선거의 결과가 달랐다면 내 삶도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지나간 일이다. 내 길을 찾아야 할 시점이었다. 아니, 내가 가야 할 길로 돌아와야 할 시점이었다. 더 늦기 전에.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어쩌면 위기감은 나만의 해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망쳐놓은 인생을 나 스스로 한 번 더 망친다는 기분은 후련하지 않았다. 외려 생각보다 참담해서 나는 가만히 소스라쳤다. 그것은 내 길이 어떤 길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었다. 그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저 있을 법한 여러 가지 오답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오답을 피한다고 정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답의 반대가 곧 정답인 것은 아니었다. 오답은 오답일 뿐이었다. 정답을 찾는 데 오답은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않았다. 오답은 냉정했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린 것이 그나마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도심에서 집회가 있던 날이었다. 시위 도중에 붙잡혔다. 나는 원체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그날따라 발목이 좋지 않아 제대로 뛸 수도 없었다. 결국 대열 뒤로 처지고 말았다. 그들은 나를 놓치지 않았다. 무리에서 낙오한 부실하고 연약한 사냥감을 결코 놓칠 줄 모르는 굶주린 맹수들처럼 그들은 집요했다. 그 매서운 손끝에 나는 말 그대로 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리고 두들겨 맞았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맹렬한 구타 세례. 어느 오래된 아프리카 부족의 남자가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기 위해서 치러야 한다는 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그들은 두 줄로 늘어서서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나를 군홧발로 마구 걷어찼다. 최선을 다한, 오래고 긴 발길질이었다. 나를 향한 살벌한 증오가 느껴졌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증오의 근원을. 일면식도 없지만, 나와 같은 세대인 그들의 무지막지한 증오를, 그 정체를 나는 결코 알 길이 없었다. 온몸에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찰과상투성이의 몸은 내 눈에도 흉했다. 어디다 대고 하소연할 수 있는 상황도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낱낱의 불이익을 인권 차원에서 알뜰히 문제 삼을 수 있던 시절이 못되었다. 그들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하게 굴었다.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철창으로 무장된 버스에 실려 어디론가 이송되었다. 거기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다른 지역 관할 경찰서였다. 워낙 검거된 학생들이 많아 한 곳에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치소는 넓었다. 권투도장 같았다. 실제로 그들은 여기서 틈날 때마다 무술 훈련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휑했다. 추웠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좋지 않은 냄새가 감돌았다. 천장 가까이에 있는 환기구에서 팬이 부지런히 돌아가며 공기를 빼내고 있는데도 냄새는 여전했다. 그래도 곧 익숙해졌다. 후각은 마비된 것처럼 금세 무디어졌다. 하지만 음식에는 좀처럼 적응할 수 없었다. 콩밥이 아니었다. 누런 양은 도시락통에 담겨 나오는 꽁보리밥에 강된장 한 줌, 그리고 단무지가 전부였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못 되었다. 바닥에 나란히 깔린 매트리스 위에 나처럼 붙잡혀 들어온 학생들이 빙 둘러 가며 엄중한 감시 속에 조용히 드러누워 있었다. 매트리스는 차고 단단했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통증은 사라져 주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꾸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거기에 느닷없이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밤새 서에서 집으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나는 놀랐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뭔가 적극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했다, 그지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