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병원, 세 번째
23. 병원, 세 번째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진행 중인 것이다.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뭔가 미진하다. 교향곡을 삼 악장까지만 듣고 콘서트홀을 나온 것 같다. 다시 돌아가 사 악장을 마저 들어야 한다. 그게 맞다. 내 감각이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그러라고 나를 부추긴다. 나는 순순히 거기에 응하기로 한다. 어쩌겠는가. 지금 나는 그런 부추김에 저항할 힘이 없다.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젓기에는 기운이 모자란다. 마음을 접는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게 불편하지 않다. 이제는 익숙해진 체념이다. 거부감을 느낄 수 없다.
여동생이 로비로 들어선다. 병원 근처 약국에서 소독약과 드레싱밴드를 사 오는 길이다. 물론 내가 앞으로 계속 먹어야 할 약도 받았을 것이다. 우산을 접을 때 바닥에 빗물이 뚝뚝 듣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시력이 갑자기 회복된 느낌이 든다. 카메라 망원렌즈의 초점이 제대로 맞추어진 것처럼. 이제 일어서야 한다. 그 준비로 슬그머니 몸을 긴장시킨다. 앉은 자세에서 갑자기 일어설 때가 제일 위험하다는 걸 이제 나는 잘 안다. 통증과 현기증이 한꺼번에 엄습하는 순간이다. 처음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아직 내 몸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잠시라도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해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아니, 안전을 염려해서라기보다는 그 순간의 느낌이 싫어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벌써 일어서 있다. 택시를 잡아 올 테니 좀 더 앉아 있으라고 어머니가 나한테 손짓하며 말한다. 순종한다. 몸의 긴장을 풀지 않으면서 짐짓 다시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붙이는 시늉을 한다. 그렇게 앉아서 나는 로비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없다. 나는 환자다. 알고 있다. 신기하고 생경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여동생도, 지금 모두가 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러나 황송하지도 않다. 어느 쪽인가 하면, 나는 거의 즐기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내 심장에 두꺼운 막 같은 것을 한 꺼풀 덮씌운 듯하다. 이것이 염치를 느끼는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역시 보상심리 같은 게 있는 것일까. 마땅히 받아야 하고 누려야 하는 대접. 지금까지의 홀대에 대한 벌충. 이렇게 시나브로 나는 자꾸 뻔뻔스러워져 간다.
이런 대접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딱 한 가지 떠올릴 수 있는 게 있다. 로비 밖으로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어이 나는 그걸 기억 속에서 찾아 끄집어낸다. 또 초등학교 때였다. 병이 들었던 것은 아니고, 손가락 다친 것이 덧나 곪았다. 퉁퉁 부어 잘 구부러지지 않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놀다가 다치는 일은 흔했지만, 곪을 정도로 악화된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치료 시기를 놓쳤다. 결국 병원에 갔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갔다. 사방이 캄캄하고 거리가 조용했던 것으로 미루어 늦은 밤이었던 것 같다. 큰 병원 응급실이 아니라 동네 개인병원이었다.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각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일반인의 거리통행이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굳이 그런 밤늦은 시각에 동네병원을, 그것도 외과가 아닌 내과를 찾은 것을 보면 이튿날까지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부모님이 보기에 내 손가락의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신기하게도 없다.
어머니보다 연배가 조금 위인 중년의 여의사는 군말 없이 친절하게 우리를 받아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사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평소 친분이 있다면 있는 사이였다. 병원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집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우리 집 대문과 그 병원 출입문은 각기 다른 골목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 있어서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간 걸어야 했다. 새로 지어 올린 이 층짜리 흰색 병원 건물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의사네 가족이 사는 같은 이 층짜리 가정집이 있었다. 거기서 담 너머로 우리 집 안마당의 텃밭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는 것을 언젠가 한 번 어머니를 따라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가족은 그 병원의 단골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할 것 없이 아픈 사람이 생기면 우선 그 병원부터 찾곤 하였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 아마도 어머니가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이웃이었을 것이다. 두 분이 처음 서로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의사와 환자로 만나기 시작했겠지만, 꼭 집에 아픈 사람이 없어도 어머니는 마실 삼아 이따금 그 병원에 들러서 그 여의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서로 체구도 비슷했고, 성정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의사는 금테 안경을 썼는데도 워낙 수더분한 인상에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서 그것만으로도 환자를 적이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평소 잔병치레가 많아 그 병원 출입을 누구보다 많이 했던 나는 그 여의사 앞에만 앉으면 벌써 거지반 병이 낫는 기분이 들곤 하였다.
외과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어린 나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여의사도 자기 분야가 아니니 다른 데로 가보라는 소리 따위 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평소에도 많이 해본 처치라는 듯이 여의사의 손길은 막힘없이 능란했다.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들로 나를 안심시키면서 손가락의 곪은 부위를 칼로 째서 고름을 짜내고 지혈을 한 다음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깔끔하게 마무리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언제 지나갔나 싶을 만큼 순식간에 끝났다. 나는 미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프고 겁이 나서 눈물을 찔끔 짜냈을 법한데도 별다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나는 그 여의사를 제법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한 치료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긴장했던 탓인지 처치가 다 끝났을 때 나는 적잖이 지친 기분이었다.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마도 내가 조금 휘청거렸던 모양이다. 갑자기 아버지가 내 앞에 등을 보이면서 쪼그려 앉았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업히라는 뜻임을 알아차린 것은 삼 초쯤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어머니가 아버지 쪽으로 슬쩍 밀었다. 아버지의 등은 넓었다. 시원하면서도 따뜻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분이라 조금 혼란스러웠다. 업혀 있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자꾸만 어지러웠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었다. 야속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너무나 특별한 일이어서 현실의 일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까닭이 없었다. 그날 그 순간의 아버지는 내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잊을 수는 없었다. 잊히지를 않았다. 다만 깊이 숨겨둘 수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어쩌다 나도 모르게 그 기억이 떠오를 때다. 반드시 딸려 나오는 기억이 한 가지 있다. 어쩌면 이 기억 때문에 되도록 깊이 그 기억을 숨겨두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때의 흉터를 슬며시 만져본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대학생 삼촌이 기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럴 만큼 넉넉한 형편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라는 것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방은 두 개였다. 삼촌과 나와 내 남동생, 이렇게 셋이서 방을 같이 썼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내 것과 함께 삼촌 도시락을 싸던 기억이 난다. 마뜩잖은 일이었을 텐데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 따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저녁나절 아버지가 느닷없이 삼촌 뺨을 때렸다. 둘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험한 욕설에 고함이 오간 끝에 마침내 삼촌이 짐을 싸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러저러해서 그리 되었노라고 아무도 나한테 그 저간의 깊은 속사정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겁에 질려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지시를 받고서였는지, 나 혼자만의 판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느 순간 밖으로 뛰쳐나가 우리 집 뒤의 병원을 바라고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여의사한테 아버지와 삼촌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와서 좀 말려달라고 간절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물론 여의사는 지체 없이 우리 집으로 달려왔고, 사태는 이내 수습이 되었다. 앞뒤 정황은 이렇다. 삼촌의 학교 친구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삼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삼촌의 친구라는 말에 어머니는 그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 사람은 우리 방에서 삼촌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삼촌은 귀가하지 않았다. 낯선 사내가 집에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다. 이윽고 집에 돌아온 삼촌은 그 사내와 둘이 마주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일이 터진 것은 그 사람이 돌아가고 난 직후였다. 처음에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야단치는 줄 알았다. 한데 뺨을 맞은 것은 삼촌이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가운데 외간남자 운운하는 소리가 아버지 입에서 나왔다. 그 단어를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아듣고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그게 그토록 화를 낼 만한 일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삼촌도 어머니도 크게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삼촌의 친구라는 사람은 삼촌이 돌아올 때까지 삼촌이 쓰던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그저 얌전히 책만 읽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껏 내가 모르게 쌓여온 서로 간의 불만이 그 일을 계기로 폭발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는 나중에 내가 세상 물정을 어지간히 알게 된 다음의 짐작이었다. 아버지와 삼촌 사이는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아버지는 그렇게 형제간의 우애도 망쳤다. 그 뒤로 나는 그 병원에 가기가 싫어졌다. 처음에는 워낙 다급한 마음에 앞뒤 가릴 새도 없이 달려갔지만, 남한테 우리 집의 치부를 들켰다는 생각으로 어린 마음에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때 병원으로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도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 여전히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는 의문이 꿈틀거린다. 신세를 진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미 한 수 접은 생각이다. 그러나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문제가 생긴 컴퓨터를 재부팅시키듯 기분을 한 번 통째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쉰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다. 그마저도 못내 힘겹다. 고개를 숙인다. 가만히 마음을 다독인다. 안정이 필요하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치료였지만, 앞으로는 요양이다. 벌써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러니 나를 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다른 마음일 것이다. 나는 속절없이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다. 기대인지 불안인지, 아니면 단순한 흥분인지 잘 모르겠다. 밝은 색깔은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 지금 내 몫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지켜보자는 마음. 택시가 왔다. 일어선다. 조금 어지럽다. 그래도 몸의 긴장을 아주 풀고 있지는 않았던 덕에 버틸 만은 하다. 로비의 자동문이 열린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빗소리에 귀가 따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