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P47.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나 -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문학과지성 시인선 445, 문학과지성사)
예,
세상에는
아니,
우리 각자한테는
그런 말이
정말
있을 겁니다.
듣기만 하면
그냥
눈물이 나는
말이요.
그래서
시인의 이 고백이
참
아프고
눈물겹습니다.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나’라는 고백이요.
저도 ‘그 말’이
있든요.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 말’이요.
여러분도 지금
한 번
속으로 가만히
떠올려보시지요.
이때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일 수도,
슬픔의 눈물일 수도,
분노의 눈물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눈물이면
충분한 것을요.
눈물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
눈물 없는 인생이
무슨 삶이랍니까.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나’라는
시인의 고백에
그냥
눈물이 나네요.
그러니
‘그 말’을 해준
상대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당신이 날 안아줄 거라고 믿는다’라는 말을요.
듣기만 하면
‘그냥 눈물이 나’는
바로 ‘그 말’을 해준
상대라면
예,
얼마든지
나를 안아주지
않을까요.
아니,
아무 말 않고
그저
울고만 있어도
알아서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줄 겁니다.
이제 비로소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라는 말을요.
아,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좀
해봐야 합니다.
‘나’와 ‘너’에 대해서요
내가 상대를
너라고 부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상대가 나를
너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나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두 인칭대명사는
다시 말하면
서로 다르다는
뜻
아니겠어요.
‘나’와 ‘너’가
서로 다르다는 뜻.
상대가 ‘나’를
‘너’라고 부르는
순간
‘너’라고 불린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른
그 상대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곧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인식이
‘너’라고 불린 ‘나’를,
시인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어이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합니다.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라고요.
아마도 그래서
‘나’는 ‘당신’한테
안기고 싶었나 봅니다.
둘 사이의 거리를
가장 가깝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예,
서로 안는 것이지요.
이쪽이 저쪽을,
저쪽이 이쪽을,
예,
꼭
안아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시인은
철없는
아이가 아니에요.
새삼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면요.
‘삶은 미묘한 차이를 견디는 일이다’라고요.
아,
시인은
견디기로 한 거네요.
견뎌야 한다는 걸
아는 거네요.
‘나’와 ‘너’의 거리를
‘나’를 ‘너’라고 부르는
‘당신’과 ‘나’ 사이의
차이를
견뎌야 하다는 걸
말입니다.
견디는 건
결국
참는다는 것이고,
참는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사랑의 정의라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여,
시인은
‘헤어지면서 다정해지는 습관’을
들이기로 한
모양이네요.
왜냐하면,
헤어져야 하니까요.
‘나’와 ‘너’는
서로 다른
존재니까요.
언젠가는,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헤어져야 하니까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왜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날 안아줄 거라고 믿는’ 나는,
시인은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다정해지’기로 합니다.
나아가
숫제 그것에,
그 ‘다정’에
‘습관’을 들이기로 합니다.
아마 그것이
헤어짐을
부정하는
시인만의
비결인가 봅니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세요.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이
‘나’에게서 나온 것인지,
‘당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요.
‘나는 죽어서도 너를 떠올린단다.’
저는 어쩐지
이 말을
분명히 ‘날 안아줄’
나처럼,
나만큼이나
‘다정’한
‘다정해지’기로 한
아니, 숫제
‘다정해지는 습관’을
들이기로 한
바로 ‘당신’이 한
말이라고
믿고 싶네요.
‘죽어서도’
‘나’를
떠올린다면,
떠올려준다면,
그런 ‘당신’한테라면
예,
온 마음으로
안기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