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y Cinema Aphorism_179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79

by 김정수

CA891. 스파이크 존스, 〈어댑테이션〉(2002)

괜찮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온 존재를 내던져야 한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전언. 그러려면 불륜도 마약도 미행도 훔쳐보기도 살인까지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자존심을 꺾는 따위 일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 오로지 작품의 질만이 문제라는 것. 그러니 창작이라는 노동은 얼마나 잔혹한가.


CA892. 로렌스 캐스단, 〈드림캐처〉(2003)

외계인 콤플렉스. 특히 미국인들의 외계인 콤플렉스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부제 역할을 한다는 것. 미국인들은 언제나 적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래야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체제, 그 견고하고 막강한 국가체제의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는 것.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외계인’은 할리우드를 영원히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기에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소재라는 것. 이도 저도 다 없어지고, 세계가 문자 그대로 평화를 구가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할리우드가 우려먹을 소재는 외계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한데, 이게 도대체 언제 적 얘기인가?


CA893. 래리 & 앤디 워쇼스키, 〈매트릭스 2: 리로디드〉(2003)

프로그램이 현실이 될 때. 이 시리즈가 도달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완결편은 이다음의 이야기다. 바야흐로 현실과 가상현실이 섞이기 시작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제 그들은 더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아닌 ‘리얼 월드’에서 적과 싸워야 한다. 슈퍼맨의 가상현실 버전?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구원이라는 영원한 종교적 프로젝트에 의거한 상상력. 미국영화의 1인 영웅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구세주 콤플렉스다.


CA894. 토드 헤인즈, 〈파 프롬 헤븐〉(2002)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에게 남은 선택은 자신을 가장 이해해 주는 사람한테로 떠나는 것? 또는 홀로 남는 것? 이 여인의 고독에 비견될 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 전체에 어른거리는 더글라스 서크의 그림자.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한다. 그러니 이해하고 싶은 대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행복이라는 것. 그러니 이 행복은 얼마나 어렵고 위태로운 것인가.


CA895. 촐탄 슈피란델리, 〈신과 함께 가라〉(2002)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장미의 이름〉(1986, 장 자크 아노)이 된다. 수도원이란 고딕 소설의 공간이고, 수도사란 그 고딕 소설의 공간에 놓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음모’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이므로. 쇠락해 가는 수도원을 더는 유지할 수 없는 그들은 결국 본거지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그 본거지란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같은 교단 소속의 또 다른 수도원이다. 더욱이 그것은 예전에 파문을 당했던 적이 있는 교단의 수도원이다. 하필 그곳으로 기어이 가려는 이유는? 차라리 교세가 넉넉한 다른 교단에 투항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그들이 애초 목표로 했던 수도원에 당도하고야 만다. 거기까지의 여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교단이냐가 아니라, 신에게 충실하려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여정의 충실함 자체가 핵심이다. ‘신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테니까. *

keyword
이전 28화My Cinema Aphorism_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