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78
CA886. 알란 파커, 〈데이비드 게일〉(2002)
사형제도의 모순을 이야기구조 자체로 드러내 보여주는 드문 사례. 한순간의 도덕적 실수로 인생을 망친 남자와 불치병에 걸려 속절없이 인생을 마감해야만 하는 여자가 사형제도의 모순을 증명하기 위한 거대한 기획을 한다. 하지만 그 기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다. 그들은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다.
CA887. 롭 마셜, 〈시카고〉(2002)
보는 동안 문득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영화, 또는 뮤지컬, 또는 뮤지컬 영화. 휘황찬란한 이미지와 춤과 음악이 눈과 귀를 쉴 틈 없이 자극하고 드는데도 어느 순간 관객은 속절없이 마비를 닮은 가수(假睡) 상태에 빠져든다. 이 점에서 〈시카고〉보다 앞줄에 서는 영화, 또는 뮤지컬, 또는 뮤지컬 영화가 또 있을까.
CA888. 허우 샤오시엔, 〈밀레니엄 맘보〉(2001)
허우 샤오시엔은 ‘마침내’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한 강박증을 벗어던지고, 현시대 대만 젊은이들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애정을 마음껏 과시한다. 아니, 그 애정을 마음껏 과시할 준비를 해두었음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제 허우 샤오시엔의 전언은 온전히 대만 젊은이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대만 바깥, 그것도 일본의 유바리로 나간 것도 이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밖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대만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한테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그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한데, 그로부터 4반 세기가 지난 2025년 대만의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왼손잡이 소녀〉(쩌우스칭)(!)다.
CA889.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Talk to Her)〉(2002)
코마 상태에 빠진 두 여인. 그녀들에게 말을 걸어라. 그녀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각기 제 파트너를 잃어버리고 남은 두 남녀가 새로운 파트너가 되리라는 희망의 암시를 하며 끝나는 이야기는 알모도바르의 작품 세계가 점점 더 깊은 여유를 찾아간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노래와 춤과 눈물과 두 사내와 두 여인, 그리고 사랑과 죽음, 세월, 무엇보다도 인생―.
CA890. 마이클 무어, 〈볼링 포 콜럼바인〉(2002)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려는 것은 인간이 망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끊임없이 국민에게 공포를 주입하는 것은 결국 망상을 이용하여 소수의 이익을 챙겨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전언. 하지만 한 번 조성된 공포는 망상의 형태로 끝까지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마이클 무어는 바로 이 공포의 이면을 종횡무진 까발려 보인다. 그 결과 미국이 얼마나 거대한 허위의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인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