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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03. 2024

20. 어느 행동가의 아름다운 자기소개

  - 마더 테레사, 《즐거운 마음》

20. 어느 행동가의 아름다운 자기소개 / 《즐거운 마음》 - 마더 테레사 지음, 김순현 옮김, 오늘의 책

명실상부한 세계인

   마더 테레사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 또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라는 질문에 한순간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고 대뜸 ‘유고슬라비아!’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는 마틴 루터 킹이 미국 사람,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독일 사람,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영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경우에 비추어 보면, 아무래도 예사롭게 지나칠 문제는 아니지 않나 싶은 느낌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이 질문 자체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를 지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마더 테레사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든, 또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야말로 문자 그대로 ‘세계인’이기 때문이지요.

   그의 사전에는 ‘차별’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을 문자 그대로 차별 없이 품었으니까요. 심지어는 ‘구별’조차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입니다.     


행동으로 하는 자기소개

   한데도 제가 이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 질문 앞에서 속절없이 ‘우리가 마더 테레사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솟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마도 다 알고 있는, 혹은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저 예수님에 관해서 우리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과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의문이 솟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자기소개’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선 예수님께서는 자기소개 따위나 하고 계실 만큼 한가롭게 살지 않으신 탓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행동만으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사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더 테레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행동 자체가 자기소개인 사람, 행동으로써만 스스로에 대해 무언가를 발언하면서 산 사람―.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가 그에 대해서 무언가 안다고 말할 때 그 ‘무언가’는 그 당사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한테서 얻어들은 이야기이기 십상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 사람 곁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몸소 좇아가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이상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 그 부실한 목격자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행운아들인 셈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무언가 안다고 말할 때 이 ‘무언가’는 바로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을 몸소 쫓아가며 예수님의 행동을 직접 자기 눈으로 목격하는 유례없는 행운을 누렸던 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바에야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는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흔히 그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가시기 직전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시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야 어떻게 되시든 아랑곳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당사자의 가까이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사자에 대해서 감히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말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저마다 조금씩, 때로는 아주 많이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합니다.

   네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네 개의 서로 다른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 들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객관적인 근거자료는 결국 그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이 책 《즐거운 마음》은 바로 그런 성격의 ‘말’들로만 온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테레사 수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저술가가 아닌 행동가

   이 책 맨 첫머리의 ‘엮은이의 말’은 이런 점에서 참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엮은이는 단호히 이렇게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저술가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저술가가 아닙니다. 행동가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책을 펴낼 목적으로 글을 써본 일이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책을 펴내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마더 테레사의 자기소개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지요. 예수님도 무언가를 쓰시는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을 알리시거나, 자신의 뜻을 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저술가가 아니라 행동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마더 테레사가 생전에 했던 말들, 곧 연설, 강연, 대담, 회견 등으로만 온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크게 보아 일종의 녹취록이기도 한 셈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마더 테레사의 육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을 때 이 ‘말’들이 우리에게 주는 감흥은 여느 책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것입니다. 이는 곧 그의 마음을 직접 읽는, 혹은 듣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평전 따위와는 애초부터 다른 것입니다.     


질문, 질문, 질문

   한데, 이것이 ‘글’이 아니라 ‘말’이어서일까요? 마더 테레사가 구사하는 흥미로운 말버릇 두 가지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아니, 가슴을 칩니다.

   하나는 질문의 형식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거듭거듭, 집요하게 물음표를 던집니다.

   ‘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우리의 집과 가정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까?’

   ‘그리스도의 가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 우리 가정의 빈곤, 우리 공동체의 빈곤을 정말로 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정의 따뜻함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남편이 직장을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는 그를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외로움에 지쳐 풀이 죽은 사람들, 거절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수건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 곁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알기나 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부수어달라고 할 만큼 충분히 강합니까?’

   고작 몇 가지 사례만 들어도 이 정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가슴을 사정없이 쾅쾅 두드리는 물음표들 아닌가요?

   이 질문들은 마더 테레사가 우리한테 던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한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물음표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집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또 하나는 ‘가장’이라는 수식어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말할 때 그 앞에 ‘가장’이라는 수식어 붙이는 것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요컨대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그가 멀고 먼 인도, 그 가난의 상징과도 같은 나라의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열어 밤낮없이 돌보는 사람들이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가난’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숨을 쉬고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진짜 가난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알 까닭이 없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라는 고약한 옛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하는 것일까? 실은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 구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안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싫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애초 자기들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거나, 부정당하거나, 거절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또는 당신들은, 또는 그들은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가난한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못 구한다는 가증스러운 말로 짐짓 스스로를 거짓 위로하며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더 테레사라면 분명히 이렇게 물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가난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진짜 제자

   마더 테레사는 그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감히’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돌볼 뿐입니다.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듯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잊지 않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를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빼놓지 않는 그의 태도가, 그 마음가짐이 무척이나 소중합니다. 그리스도를 빼놓는다면 그것은 한갓 사회사업, 또는 자선사업일 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그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리스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리 하라고 가르치셨으니, 그 말씀을 따라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섬길 뿐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제자’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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