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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08. 2024

21.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 직업

  - 다이라 아즈코, 《먹고 자는 곳 사는 곳》

21.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 직업 / 《먹고 자는 곳 사는 곳》 - 다이라 아즈코 지음, 김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직업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구체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은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그 직업 자체의, 또는 그 직업하고 관련된 일상의 자질구레한,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만큼 사실적인 디테일이 독자인 제 흥미를 유별나게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꼭 특별한 직업일 필요는 없습니다. 묘사가 핍진하고 접근하는 마음가짐이 진지하다면 그 어떤 직업도 어김없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 속에서는 어떠한지 몰라도,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리오가 바로 그렇듯 구체적인 직업을 가진 인물입니다.

   리오는 여성입니다. 이 소설에서만큼은 이 사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리오는 중간에 직업을 바꾸지요. 처음에는 구인 광고를 전문으로 게재하는 잡지의 부편집장이었다가, 나중에 건설회사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잡지와 건설―. 서로 그 성격이 너무나 다른 직업 아닙니까.

   하지만 리오가 여성이니까 건설회사에서 책상머리에 얌전히 앉아 경리(經理) 따위의 사무를 보는 일을 하리라고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여기에 이 소설의 독특함이 놓여 있습니다.

   리오는 건설 현장을 그야말로 종횡무진 누비고 다닙니다. 그렇게 거친 근육질의 남성들, 오랜 세월 육체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현장 노동자들과 부대낍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해놓으면 리오를 남성보다 더 당찬 여성, 일종의 여장부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오는 당차기는 해도 결코 장부 스타일은 아닙니다. 여기에 이 소설의 특장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리오는 그 흔해 빠진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입지전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지향점은 ‘이해’입니다.

   직업을 통해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그 직업 자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의 과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윤기

   이 소설의 작가가 〈여자, 정혜〉(2005)의 이윤기 감독이 만든 〈아주 특별한 손님〉(2006)과 〈멋진 하루〉(2008)라는 영화 두 편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제가 이 소설을 붙잡은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아니, 도저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해야 맞을 것 같군요.

   물론 그 두 영화의 원작 소설은 전부 단편이고, 이 소설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은 장편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같은 소설이라도 그 성격이 서로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작가의 단편이 매력적이라고 장편도 매력적이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떤 작가가 단편을 잘 쓴다고 장편도 잘 쓰리라는 보장 역시 없지요.

   단편은 단편이고, 장편은 장편입니다.

   단편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매력을 장편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고, 단편의 매력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매력을 장편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마 이 맨 마지막 항목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컨대 저는 지금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이 참 매력적이라는 말을 이렇듯 에둘러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학적인 매력과는 거리가 좀 먼 편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는 ‘이야기’의 매력입니다.

   사실 저는 문학적인 매력보다는 이야기의 매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적어도 이야기가 더 먼저라는 생각이지요.

   문학과 이야기가 서로 어떤 점이 다르냐고 대놓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문학’으로서의 소설보다는 ‘이야기’로서의 소설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는 식으로 고백할 수는 있겠습니다. ‘문학이기 이전에 먼저 이야기여야 한다’라고 한다면 말이 될까요.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저한테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정신

   모든 직업에는 어떤 ‘정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숙련된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그 직업 고유의 정신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이 바로 이 정신에 관계되는 말입니다.

   집을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으로 파악하고 정의하는 것의 중요성―.

   그렇기에 집은 무엇보다도 귀하고, 따라서 정성을 다하여 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너무도 상투적인, 그러나 상투적이기에 너무나 잊기 쉬운 인식, 또는 진리를 이 소설은 우리에게 자근자근 들려줍니다.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이거나 사회적인 계층이나 계급의 증표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의 메시지는 참 감명 깊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비로소 집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기분입니다.

   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이나 계층과 계급의 증표로 인식할 때 세상은 지옥이 되지만, 집을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으로 인식할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됩니다.

   자동차도 이와 비슷한 구실을 하지요? 편리한 이동 수단이기만 하지는 않은 것이 현실 아닙니까.

   재산 증식의 수단이나 계층과 계급의 증표인 집은 행복한 공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실 공사가 만연하는 것이고, 꼭 필요하지는 않은 시설들을 과도하게 들여놓는 것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무시한 단절된 공간의 밀폐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날이, 시나브로, 점점 더 황폐해져 가는 것이고요. 이것이 바로 현대 도시민의 비극입니다.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이나 계층과 계급의 증표가 아닌 ‘먹고 자는 곳 사는 곳’으로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강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행복하게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강제입니다.

   이 인식이 우리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언제나 무시되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문제를 거듭거듭 곱씹어 보게 만듭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추신, 연애 이야기

   모든 편지에는 추신이 있듯, 이 소설에도 나무로 치면 튼튼한 뿌리나 줄기가 아닌, 그 나무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가지와 잎 혹은 꽃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연애 스토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 연애마저도 직업을 통한 것입니다. 이 직업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연애 감정의 깊이와 진정성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 남다릅니다.

   더욱이 이것은 건설 현장 노동자의 연애입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그리 흔하게 보는 광경은 아니지요? 그래서 더욱 흥미롭고, 읽어나갈수록 잔잔한 감동으로 가슴이 젖어 듭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직업에 종사하던 남녀가 만나 조금씩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져 가는 과정의 은근함, 그리고 상대한테서 무엇인가를, 특히 인간에 대한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모습의 기특함은 이 소설이 지닌 또 다른 매력의 바탕이 됩니다.

   한마디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고 싶은 연애입니다.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기억에 남는 다음의 몇몇 문장들을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모두 집, 또는 건설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 건설 현장은 조용하다.

  - 지금 당신이 신경 쓰는 건 외관뿐인데, 겉보기와 편리함은 달라요. 쓰기 불편해서 개축하는 거 아닌가요? 제발 본래 목적을 잊지 말라고요.

  - 인부가 새로운 재료를 다루는 손놀림은 섬세하다. 내려놓을 때도, 들 때도 숨을 모아 집중하기 때문에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다. 소중한 상품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리오의 눈에는 그들이 재료를 물건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 집이란 옷이나 구두와 다르다. 자기 것으로 하려면 20~30년에 걸친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돈이 든다. 말하자면 건설업자는 한 사람이 일생을 걸고 손에 넣는 것을 만드는 사람이다.

  - 집은 생활의 기본이다. 집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 집은 충동이나 유행에 따라 가볍게 손에 넣었다 싫증 났다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한 사람의 일생을 건 소원을 이뤄주는 일이야말로 제 인생을 바칠 만한 일이고, 그래서 진심을 다해 임하겠다고 결심했어요.

  -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요. 자고, 먹고, 쉬고,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 역시 우리 집이 최고구나 하죠.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정겹게 느껴져요. 한밤중에 일어나 잠결에도 제대로 화장실을 찾아가는 건 몸이 공간을 기억했기 때문이잖아요. 집이란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의 일부가 돼요. 그런 것을 만들다니…….

  - 통풍이 잘되는 구조는 사는 사람의 마음도 편하게 하고 집의 수명도 길어져요. 집도 호흡을 하니까요.

  - 툇마루는 집의 손바닥이다.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고 따뜻하게 품는다. 아무리 집이 잠겼어도 툇마루는 밖을 향해 열려 있다. 툇마루는 안과 밖을 잇는 가교다.

  - 건축 일을 하면 경건해진다. …… 땅을 파고, 산에서 잘라 온 나무를 쓰고, 날씨를 살피고, 땅과 공기를 직접 접하며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전해진다. 영기(靈氣). 초자연적인 현상 같지만 리오는 이제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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