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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26. 2024

18. 색깔의 경계를 넘어서

  - 베벌리 나이두,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

18. 색깔의 경계를 넘어서 /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 -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생각과느낌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흔히 다음의 두 가지 이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는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가혹한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이고, 또 하나는 그에 대한 저항과 흑백 간 화합을 위해 노력한 공적으로 당시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드 클락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입니다.

   만델라는 그 뒤 흑인과 백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부여된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거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되었지요.

   제목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인 이 책이 들려주는 것도 바로 그런 내용과 성격의 이야기들입니다.

   책 첫머리의 추천사에서, 역시 인종 차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애쓴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이렇게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에게 “동등한 인간을 다시는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인종 차별 상황에 대한 증언

   하지만 이 책은 정치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입니다.

   저자의 이력이 눈길을 끕니다.

   1943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한 백인 가정의 딸로 태어난 저자 베벌리 나이두는 어린 시절 흑인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그는 어린 마음에도 흑인들이 차별받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겼고,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사회문제에 눈을 뜬 다음에는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을 하다가 체포, 투옥되어 8주간 독방 신세를 지기도 합니다.

   뒤에 그는 남아공의 극심한 인종 차별의 상황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영국으로 건너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집필활동을 병행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소설들도 하나같이 남아공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종 차별 상황에 대한 나름 나름의 증언들입니다.

   독특한 것은, 주인공이 모두 어린이라는 점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른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어린이라는 필터를 거쳤기에 이야기 하나하나가 읽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저미고 듭니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이 일곱 편의 단편 각각의 첫머리에 해당 이야기가 언제 벌어진 일인지를 알려주는 연도표기를 해두었습니다.

   맨 첫 이야기는 1948년의 일이고, 맨 나중의 이야기는 2000년의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남아공의 인권상황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또 동시에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견주어 보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남아공의 흑인들이 어떤 차별 대우와 고난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1948년 / 차별의 목격

   첫 이야기 〈모험〉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공식 명칭이 생긴 해인 1948년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요하네스버그에 사는 어린 백인 소녀로, 나이나 출신배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아마도 작가의 분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도 자전적인 냄새를 물씬 풍깁니다.

   소녀는 부모님을 따라 시골로 휴가 여행을 옵니다. 거기서 소녀는 짓궂은 또래 남자아이들한테서 자기들과 같이 놀고 싶으면 그 동네의 한 성질 괴팍한 백인 아저씨네 집에 몰래 들어가 그곳 정원에 있는 포인세티아 잎을 따오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소녀는 내키지 않지만, 따돌림을 당하는 게 싫어 겁이 나는데도 억지로 참고 그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그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소녀는 자기보다 먼저 그곳에 숨어 들어온 또래의 흑인 소년이 주인한테 들키는 바람에 도둑으로 몰려 피투성이가 되도록 호되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물론 소녀도 들키지만, 그 집주인은 소녀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꾸짖지도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돌려보냅니다.

   소녀는 마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어린 백인 소녀가 흑인이 백인과 똑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차별 대우를 받는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입니다.     


1955년 / 혼혈도 흑인이야

   다음은 1955년, 한 흑인 소년의 눈에 비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부당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흑백 혼혈로, 완전한 흑인보다 조금은 나은 사회적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인종 분류 심사를 받은 결과 흑인 원주민의 처지로 신분이 강등되는 바람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당국자는 냉담하게 말합니다.

   “커피에 우유를 타면 뭐가 되지? 커피야. 흑인 피에 백인 피가 섞여도 흑인이야.”

   〈올가미〉라는 제목이 섬뜩합니다.     


1960년 / 흑인을 도와주지 마

   〈언젠가는, 릴리, 언젠가는〉은 1960년 당시 백인이 흑인을 돕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여섯 살 난 백인 소녀의 시각으로 보여줍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여 흑인들을 돕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됩니다. 그 소문이 퍼져 소녀는 학교에서 같은 백인 친구들한테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1976년 / 악화해 가는 인권상황

   〈타자기〉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에 맞서 싸우는 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열한 살 흑인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손녀가 불온 유인물을 작성하는 데 쓰던 타자기를 경찰의 눈을 피해 숨기려는 할머니의 노력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조바심이 눈에 잡힐 듯 생생히 그려집니다.

   이것은 1976년의 상황입니다.

   남아공 흑인들의 인권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1985년 / 무장투쟁의 시대

   이제 이야기는 1980년대로 넘어갑니다.

   남아공 정부가 무장투쟁을 벌이는 흑인들을 가혹하게 제재하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시기입니다.

   흑인 소년 에시는, 백인 주인의 영지를 돌보며 그의 사냥을 돕는 일을 하는 아버지가 거기서 인간 이하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하는 흑인들의 단체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삶의 터전과 부모의 품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어린 소년의 처지가 가슴을 저밉니다.

   이것이 1985년, 〈총〉의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두 편은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출소하여 남아공의 대통령이 된 뒤의 이야기입니다.     


1995년 / 바뀐 정책과 바뀌지 않은 마음

   1995년,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가 마침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당당히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고, 더불어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었는데도 흑백 간 갈등과 편견의 골은 여전히 깊다는 것을 〈학교 운동장〉은 보여줍니다.

   법과 정책은 바뀌었지만, 그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지요.

   흑인 소녀 로사는 학교가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도록 하는 정책이 실행되어 백인 학생들 일색인 학교에 다니기로 합니다.

   하지만 백인 학부모들은 이를 반대하여 교장에게 항의하고, 백인 학생들은 로사를 따돌리며 괴롭힙니다.

   당연히 로사는 불평하지만, 로사의 어머니는 그래도 다녀야 한다고, 그러면 학교는 언젠가 반드시 모두가 행복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는 ‘무지개 학교’가 되리라며 딸을 독려합니다.     


2000년 / 아름다운 교류, 장벽을 넘어서

   드디어 2000년, 21세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마지막 이야기 〈장벽을 넘어〉는 오랜 세월 동안 흑백 분리 정책이 계속된 결과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 벌어진 경제적인 격차에 눈길을 돌립니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많은 흑인 원주민이 하루아침에 이재민 신세가 됩니다. 질병이 창궐하고, 식량과 물이 부족해집니다.

   백인 소년 로한은 흑인들이 함부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단속을 잘하라는 부모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얻으러 온 불쌍한 흑인 소년에게 기꺼이 물을 내어줍니다. 나아가 그 아이의 집까지 함께 그 물을 날라다 주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뜻밖의 도움을 받은 흑인 소년은 철사로 만든 예쁜 자동차를 로한에게 답례의 선물로 건네줍니다. 둘은 서로의 장벽을 넘어서 아름다운 교류를 한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장래는 바로 그런 이해와 교류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이 단편집에 담긴 작가의 소망은 분명합니다. 이 소망이 어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해당하는 것이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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