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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24. 2024

17. 침묵의 섭리, 배교의 사랑

  - 엔도 슈사쿠, 《침묵》

17. 침묵의 섭리, 배교의 사랑 / 《침묵》 -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홍성사

스승의 배교와 선교의 결심

   조선이 병자호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1637년, 멀리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의 세 젊은 사제들이 이역만리 타국인 일본 땅에 선교를 하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이 신학생 시절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던 존경하는 스승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끔찍한 고문을 받고,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배교(背敎)를 했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충격적인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1614년, 전국시대를 끝내고 마침내 일본의 패권을 손아귀에 거머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열도의 모든 가톨릭 성직자에 대한 국외 추방령을 내립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그 뒤로도 오랜 세월 동안 꿋꿋이 일본 땅에 남아 불굴의 의지로 포교 활동을 하던 명망 높은 신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고문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 것이 아니라, 불명예스럽게도 믿음과 교회를 버리고 이교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제자로서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내세운 명목은 선교였지만, 그들이 교황청 당국에서도 선교사 파송에 난색을 표할 만큼 위험천만한 곳인 그 멀고 먼 일본 땅으로 만난을 무릅쓰고 기어이 건너가려고 한 것은, 바로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인지, 그 진실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장편소설 《침묵》은 바로 이 젊은 사제들의 이야기입니다.     


선교의 역사, 순교의 역사

   이 소설은 진술 형식이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그 세 젊은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인 세바스찬 로드리꼬 신부가 고국의 예수회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 격의 편지로 이루어진 1인칭 시점의 진술이고, 뒷부분은 바로 그 로드리꼬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3인칭 시점의 진술입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은 신부가 무사히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시기의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신도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일본 관헌에 신부가 체포되어 더는 편지를 쓸 수 없게 된 시기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교의 역사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얼마간 궤를 같이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끔찍한 순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지금 우리는 그 옛날 생때같은 젊은 사제들이 이역만리 타국의 오지로 떠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또 그 과정에서 실제로 수많은 선교사가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한갓 지식으로는 알고 있을지언정 뼛속 깊이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선교사들의 고생담은 물론이고, 목숨을 위협당하며 하루하루를 마음졸이는 가운데 보냈던 그들의 영혼 속 깊은 곳의 고뇌와 공포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천신만고 끝의 도착

   때는 비행기는커녕 증기기관조차 발명되어 있지 않던 17세기입니다.

   선교는 둘째 치고, 유럽의 서쪽 끝인 포르투갈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인 일본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배를 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휘돌아 가야 하는, 1년이 훨씬 넘게 걸리는 길고 긴 대장정이지요.

   그 여정 동안 그 세 젊은 선교사들은, 당연히, 시도 때도 없이 거듭되는 풍랑과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정박하는 항구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일본에서 막부군(幕府軍)이 가톨릭교도 수천 명을 학살했다는 따위 끔찍한 소식들뿐입니다.

   결국, 그들 셋 가운데 한 사람은 도중에 병을 얻어서 죽고, 나머지 둘만이 천신만고 끝에 일본 땅에 발을 딛는 데 성공합니다.

   환영인파 따위가 있을 턱이 없지요. 발각되면 바로 죽음이니, 야음(夜陰)을 틈타 몰래 상륙하여 숨어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과 관련하여 그때 일본의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을 만큼 암담합니다.     


배신자와 배교자

   여기서 작가는 두 명의 문제적인 일본인을 등장시켜 사제들과 대립시킵니다.

   한 사람은 두 사제를 안내해 주다 배신을 하게 되는 젊은 농민 기찌지로이고, 또 한 사람은 페레이라 신부를 배교시킨 것으로 악명 높은 관리 이노우에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한때 세례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가 뒷날 배교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스승을 팔아먹은 제자 가룟 유다를 연상시키는 기찌지로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사제들을 배신하여 관헌에 팔아넘기는 딱한 인물이고, 이노우에는 그런 사제들을 여러 가지로 교묘하게 시험에 들게 하여 마침내 배교시키는 무서운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선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한 젊은 사제가 배신자와 배교자에 맞서 그 자신의 신앙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배교의 유혹과 신의 침묵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관헌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본 농촌의 가톨릭 신도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애정, 그리고 뼈를 깎아내는 것 같은 순교에 대한 공포와 비장한 각오 사이에서 로드리꼬는 날마다 고뇌하고 갈등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옛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가까스로 견뎌 나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로드리꼬의 일본행이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에서 비롯된 만큼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로드리꼬의 포교 활동이 아니라, 기찌지로의 배신으로 그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마침내 이노우에와 대면한 이후입니다.

   이노우에는 한때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인물답게 기독교 교리와 믿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로드리꼬의 믿음을 흔들고 격파하여 마침내 배교에 이르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섭도록 놀라운 수완을 발휘합니다.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심문은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일종의 종교 토론입니다. 그만큼 교묘하고 치열합니다. 이 대목이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그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뿐이라면 사태는 간단합니다. 당당히 순교를 택하면 되니까요. 로드리꼬는 선교사로서 이미 그럴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 페레이라가 그랬듯이 로드리꼬도 이노우에가 감행하는 교묘하기 짝이 없는 배교의 유혹과 간계(奸計) 앞에서 여지없이 흔들립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로드리꼬가 마침내 무너지는 것은 이노우에를 대신하여 나타난 스승 페레이라 때문입니다.

   페레이라는 고문당하는 신도들의 고통에 찬 단말마의 신음을 가리키며 자기 제자인 로드리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듣고 있나? 들어주게나. 그 뒤,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신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신께 기도했지만, 신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신의 ‘침묵’에 대한 항의입니다.

   비열하게도 이노우에는 벌써 신도들이 고통에 못 이겨 모두 배교 선언을 했는데도, 이를 숨긴 채 로드리꼬가 배교하지 않으면 그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페레이라는 덧붙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배교했을 것이다.”

   이어 한 번 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배교자가 되면 교회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교계의 온갖 비난에 직면하여 명예가 땅에 떨어지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배교란 그 모든 자기희생을 무릅쓴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라는 이 기이한 논리 앞에 로드리꼬는 마침내 흔들립니다.     


배교의 사랑

   하지만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성화(聖畫)를 발로 밟음으로써 마침내 배교를 감행하는 순간 로드리꼬의 귀에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여기서 로드리꼬의 신앙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그의 감동적인 마지막 고백이 이어집니다.

   ‘나는 그들은 배반해도 그분을 결코 배반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다.’

   물론 이 소설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면 마지막 순간 로드리꼬 신부의 배교 결정은 분명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타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신부의 마지막 고백은 자신의 종교적인 타협을 교묘히 합리화하는 논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타협을 합리화하는 태도가 일본에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만큼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일찍 기독교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선교, 또는 복음화의 성적표는 가장 초라한 까닭이 바로 이렇게 타협을 용인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좋게 보면 유연한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한 것이지요.

   일본인의 이런 면모에 대한 다각도의 고찰이 소설의 맨 마지막 장에서 조금 더 이어집니다.

   이처럼 《침묵》은 종교의 차원에서, 신앙의 차원에서, 또 윤리의 차원에서 많은 논쟁점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소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2016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페레이라 신부 역에 리엄 니슨을, 로드리꼬 역에 앤드류 가필드를, 또 다른 선교사 역에 아담 드라이버를 캐스팅하여 만든 영화가 바로 〈사일런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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