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미장플라스."
수셰프 도미닉은 행주 위에 도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 '그날의 요리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다. 요리할 때 필요한 도구부터 재료 손질까지 모든 준비까지 통 틀어하는 말이야."
'미장플라스.'
존은 손바닥 만한 작은 노트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넣어 적었다.
"오늘은 첫날이니깐...."
도미닉은 프랩 리스트를 확인하더니 워크인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 할라피뇨 5kg를 얇게 써는 것부터 하자. 다 썰면 피클링 할 거니깐 부르렴. 레시피 알려줄게"
"네. 솊."
존은 도미닉이 냉장고에서 꺼내준 할라피뇨 2.5kg가 담긴 상자 두 개를 열고 큰 볼에 담아 씻었다.
"조나단! “
구석에서 일하던 시니어 프랩쿡 아리아나가 큰 소리로 존을 불러 말했다.
“씻고 나면 그 고추들 싹 다 캠브로에 옮겨 담아서 가져와. 쓸데없이 볼은 너무 넓어서 자리만 차지해."
"죄송해요. 캠브로가 뭐예요?"
아리아나는 있는 주름 없는 주름 다 사용해 인상을 쓰더니 언성을 높였다.
"설거지할 때 도대체가 뭘 배운 거냐. 저기 정사각형 용기 있잖아. 부피 별로 4쿼트, 8쿼트, 12쿼트, 그리고 16쿼트. 찾았어?"
"네!"
존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할라피뇨 5kg이니깐 대충 16쿼트짜리 캠브로 쓰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프랩팁 요리사들은 양쪽 볼과 귀가 빨갛게 닳아 오른 존을 보며 소리 없이 웃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를 무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존은 아리아나가 일러준 대로 씻은 할라피뇨를 16쿼트짜리 캠브로에 담아 프랩 스테이션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할라피뇨 고추 하나를 도마 위에 올리고는 칼을 이리저리 대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리아나는 그런 존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녀의 칼과 함께 존의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Behind. Behind. Sharp behind.”
(주방 용어 : 날카로운 것, 뜨거운 것, 무거운 것을 들고 이동할 때 쓰는 용어. 조심하라는 의미.)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섞여있었다.
"너는 요리하면 길바닥에 눌러앉겠다 이놈아. 이리 줘 보여줄게."
"자. 칼질은 방법과 썰고 나서의 모양에 따라붙는 이름이 다 달라. 무턱대고 외우기보단 지금 이 재료 앞에 서있는 네가 이것의 쓰임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조리 방법을 확인하고, 근조직이나 섬유질의 특징을 잘 이해해야 해. 네가 다룬 각각의 재료와 그 쓰임에 따라 칼날의 시작과 방향, 각도, 그리고 네가 주는 힘을 기억하는 습관은 항상 몸에 베여있어야 해."
아리아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질을 시작했다. 그녀의 뭉툭한 손으로 잡았던 매서운 칼의 얇고 날카로운 날은 도마에 닿을 때마다 일정한 소리의 울림을 만들었다. 계속해서 칼날에 썰려 나가는 할라피뇨 조각의 일정한 두께는 칼질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간격에 비례했다.
"일단 우리 레스토랑에서 쓰는 할라피뇨 피클은 기본적인 고리 모양이니깐 이렇게 가로로 두고 자르면 되고, 식감을 필요로 하는 가니쉬이기 때문에 종잇장처럼 얇을 필요는 없지만 너무 두꺼워서도 안되고. 딱 이 두께로 썰어봐"
존은 아리아나가 해주는 모든 말을 소리 없이 되풀이하며 그의 작은 수첩에 적어 내렸다. 보송보송한 솜털 사이로 식은땀을 흘리는 앳된 존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존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이고 야 이놈아! 컨테이너 하나 더 가져와야지. 썰어둔 조각들은 어디에 두려고!"
프랩팀에서의 첫날, 잘하고 싶어 조급했던 마음처럼 주방에 걸린 벽시계의 분침은 평소보다 족히 2배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오른쪽 검지와 약지에는 물집이 잡혔고 손바닥과 어깨가 저리기 시작했다. 조나단은 그 순간 아려오는 아픔에 집착하지도 쉬지도 않았다. 조급함에 예민했던 그의 마음은 어느새 차분해지더니 그의 시야에 남은 것은 평소보다 빨리 가는 시간도, 그의 어색함을 구경하는 남도 아니었다. 오직 그 자신과 칼뿐이었다.
3주 동안 그가 수습생으로서 주방에서 일하며 바라본 그곳의 요리사들은 모두가 그들의 역할을 알았고 각자하고 있는 일의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큰 소리를 내어도 접시가 깨져도 누구 하나 소리가 나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쩌면 들리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매일 두 시간 일찍 출근해 쿡북을 읽던 존은 그 대신 냉장고 청소를 택했다. 매일 아침 냉장고에서 상한 뿌리채소나 잎채소들을 꺼내어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그리고 프랩팀 요리사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버려질 재료들로 칼질 연습을 했다. 깨끗하고 조용한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떼 묻지 않은 새하얀 셰프 코트를 입고 앞치마를 단단히 맨 그에게 어둡고 차가웠던 과거의 흉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 중 그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투명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노의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저녁 서비스를 마친 그날, 셰프들과 감사 인사를 나눈 후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존은 작은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언제든 다시 잡을 날이 오게 된다면 해방하게
-Regard, Yono-
편지 밑에는 적갈색 소가죽으로 만든 칼 커버와 함께 존이 수습하기 첫날 셰프 요노의 마지막 칸 서랍에서 골랐던 고노스케 식칼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