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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Jul 17. 2024

수용(受容)하는 삶






유한성(有限性)


 이 세상에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은 없다. 세상속의 모든 것은 유한하다. 유한성은 인간 문명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인간 그리고 인간이 지어낸 문명도 이 세상의 한 현상 혹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문명도 발생한 이후 없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문명들은 서로 그 존속 기간이 틀릴 뿐이지 모두 새로운 문명으로 대체되는 순환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 물론 대체한 그 문명도 어느 시점이 되면 또다른 문명에 대체된다. 그래서 크게 융성하다가 어느 순간 없어진 문명의 흔적은 지구상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아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미 끝나버린 잊혀진 상태로 땅속이나 정글속 혹은 바다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다른 문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삶도 유한하다. 따라서 삶이 시작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시계의 초침이 그 끝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대략 80년으로 가정하면 초침이 약 4,200만 바퀴를 돌면 삶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진 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의 초침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열심히 돌고 있다. 끝을 향해서 말이다. 그러나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혹은 무언가에 마취되었는지 그 명백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혹은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삶이 다할 때까지 처절하게 그저 삶을 무언가에 쫓기듯이 이어갈 뿐이다. 


 담대하게 끝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부분 당황하고 후회하면서 자신의 끝을 통과하게 된다. 삶이 시작되면서 이미 약속된 끝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텐데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몸과 정신속에 켜켜이 쌓아올린 그 무엇이 인간을 계속 삶에 매달리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담대한 끝 혹은 준비된 끝을 쉽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런 나도 내 삶의 끝에 이르면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당황할지 모른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결국 그 순간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내가 거기에 포함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시작이 그 끝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시작 속에는 끝이 기본 값으로 포함되어 있다. 입학에는 졸업이 취업속에는 퇴직이나 퇴사가 내포되어 있고 결혼 속에는 이혼 혹은 사별이 암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노래도 흥미로운 전주의 시작은 조용하거나 장엄한 후주 그리고 그 노래의 끝에 찾아오는 침묵과 고요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시작은 끝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거기에 포함된 유한성을 잊지말고 늘 그 끝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든 그 끝이 어떻게 올지를 생각해서 그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준비하고 미리 공부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배워야 하고 입사를 할 때 퇴직이나 퇴사를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할 때 이혼을 준비하라는 말은 아니다. 결혼을 할 때는 그 끝인 둘 중 하나의 사별을 대비해야 한다. 장례식과 상속을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끝이 올 때까지 당황함과 후회를 줄이기 위하여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는 순간으로 둘 만의 시간을 채우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합당한 선택일 것이다. 




유한성의 적극적 수용


 그러나 어차피 모든 일에 끝이 있으니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을 갖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대충 살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단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단호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너무 당면한 삶에서 겪는 것들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우리는 그 일이 되어가는 긴 과정의 한 부분을 통과해 가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우리의 긴 삶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어떤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 사업의 큰 흐름의 한 구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자각이 필요하다. 이러한 긴 관점의 자각이 있을 때 비로서 집착이나 과도한 욕심을 조금 더 내려 놓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만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에 해를 가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사람들이 삶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다양한 실수를 하는 이유는 이런 유한성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닿을 수 없는 무한한 그 무엇을 끝없이 추구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심이 그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의 경우가 매우 명확한 예이다. 돈은 숫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숫자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돈에 대한 집착도 그 끝이 없다. 물론 돈은 삶에 필요한 상당히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정 수준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돈에 집착하는 것(관심을 두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제로섬 게임을 운운하면서 타인의 부를 일방적으로 취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집착과 욕심은 자주 범죄로 이어진다. 타인의 금품을 노리고 도둑질을 하는 사람의 범죄 목적은 타인의 부를 가로채서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자기 만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부를 부당한 수단을 써서라도 얻고자 하는 욕심이 범죄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법적으로 범법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들도 있지만 교묘하게 잘 드러나지 않게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교활한 범법자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자들이 유한성의 법칙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과연 그렇게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고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 할지 의문이다. 간혹 그런 자들의 입에서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도 한다.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자고도 한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 심리가 참 궁금하다. 그들도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유한성이 자신들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망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뇌에서는 다른 종류의 호르몬 분비가 많이 활성화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고 따라서 그에 준하는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을 행위로 이어지지 않게 억제하는 특수 호르몬 말이다. 실제로 밝혀진 뇌 호르몬은 약 100여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호르몬은 무려 4,000여 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출처. 뇌를 아니? / 저자 정은아) 이런 관점이라면 유독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에게서 특별히 더 많이 나오는 호르몬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도 가능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뻔히 나쁜 짓임을 알면서 저지르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위 논리를 적용하면 아마도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있더라도 매우 낮게 분비되는 특수 호르몬을 유독 더 많이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끝없이 다량 분비가 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범죄자의 심리


 집착과 욕심의 종착점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종착점은 바로 범죄 혹은 죄이다. 타인에 대한 것은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죄를 짓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중 타인에게 유해한 일을 하는 사람의 위해 행위가 법적 허용치를 초과하면 그는 범죄인으로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힌다. 이와 달리 비록 법적 허용치를 초과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유해한 일을 하는 사람 역시 본질적으로는 큰 틀에서 범죄인에 포함된다. 


 범죄는 특히 법에 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범죄의 종류는 법체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되며 행위의 정도에 따라서 나라에서 처벌한다. 반면 죄는 종교적 혹은 윤리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행위를 칭한다. 종교별로 다르겠지만 예를 들면 탐욕, 폭력 그리고 거짓말 등도 죄에 해당된다. 탐욕을 부려서 타인의 재산을 빼앗으니 탐욕은 죄이자 범죄이고 폭력을 가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니 역시 폭력도 죄이자 범죄이다. 마지막 사례인 거짓말 역시 사기를 쳐서 타인의 재산을 갈취하는 경우가 많으니 거짓말 역시 범죄이자 죄이다. 이렇게 범죄와 죄는 양상과 무게만 다를 동류라고 수 있다.


 범죄 심리학에 전문성은 없지만 상식선에서 생각할 때 범죄인이 범죄를 저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 같다. 뻔히 자신들이 저지르는 짓이 범죄 혹은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럴까를 생각해 봤다. 당연히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요인이 있을 것이고 사회의 구성원이니 사회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의미로 이루어진 생각 혹은 가치 판단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심리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먼저 생물학적 요인으로는 일종의 정신 질환 때문에 범죄 혹은 죄를 저지를도 모른다는 관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인격 장애, 분노 조절 장애, 자기 억제력 상실 등과 같은 면을 보이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분노 조절 장애는 최근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메스컴에 자주 나온다. 분노 조절 장애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분노 조절 장애가 있고,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도 분노 조절 장애를 앓는다. 


 후자는 불특정 다수에게 갑자기 공격성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결국 타인에게 중대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상해를 입히곤 한다. 그리고 전자는 대부분 조직 속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며 그들은 하위직에게 분노를 시도 때도 없이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이런 경우는 범죄로 구분되기 애매하지만 명백한 '죄'로 구분될 수 있다. 그의 분노는 대부분은 상대에 대한 불합리하고 지독한 모욕감을 주기 때문이다. 분노 조절 장애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거 정신 병자 같다' 라고 생각하면서 치를 떤다. 내가 직접 당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나도 최근 4~5년 사이에 몇 번 봤었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에도 분노 조절 장애를 보이는 사람은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다음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심리적 요인으로는 타고난 성격이나 자라난 배경 등을 살펴봐야 한다. 억압적인 가정 환경에서 양육되었을 때 폭력성이 은밀히 배양되는 경우가 많다. 콩 심은데 콩이 나는 격이다. 가정 환경이 폭력적이고 과도하게 권위적이면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그런 환경적 요인은 한 인간의 성격을 뒤틀리게 구조화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간혹 경험했는데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 중에 하나가 일반적이지 못한 성장 배경이었다. 


 그들이 길러진 그런 환경에 의하여 그들의 심리적 성향이 상당 부분 영향을 받고 결정된 것이다. 특히 그들은 공통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매우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단순화해서 그들이 공감 능력이 부족한 이유를 설명하면 바로 그들이 공감을 받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 것과 같다. 따라서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상호 보완적으로 수립하기 어렵고 자신의 관점에서 독단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시도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 정상을 벗어난 행위나 언행을 하게 되면서 범죄 혹은 죄를 저지르게 되곤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요인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심리적 요인에서 이어지는 관점인데 주로 양육 환경에서 심리적인 구조화가 이루어졌다면 가정(家庭)의 범위를 넘어서는 오랜 학교 생활 그리고 사회 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환경적 변화에도 꽤 강하게 영향 받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다. 사회적 관계를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진로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친구 따라서 강남 간다는 말이 그말이다.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런 부정적 측면의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범죄 혹은 죄를 쉽게 저지르게 되는 성향을 후천적으로 입게 될 수 있다. 


 아무튼 범죄 혹은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다양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범죄인 혹은 죄인 보다는 그렇지 않은 평범하고 선한 사람의 비중이 더 많다는 것이다. 물론 범죄인이나 죄인의 비중이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범죄인이 아닌 것에 자부심을 갖기에 앞서서 혹시 우리도 '죄인'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을 뿐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면서 자꾸 내 뒤를 돌아다 보면서 혹시라도 내가 타인에게 험한 말을 하는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하는 걱정이 된다.   




포기가 아니라 수용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유일하게 죽기 바로 전까지 거부하는 것이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정이다. 그것을 인정했다면 그렇게 타인을 모질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욕심 부리면서 끝없는 탐욕에 휘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탐욕과 욕심 그리고 타인을 해하는 행동과 언행을 했을 것이다. 


 많은 인간이 유한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단순하게 포기로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포기'는 양면성을 갖는 단어이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은 부정성을 포함하는 의미의 포기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나 희망과 달리 어떤 사실이 명백한 진실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극적 수용의 의미를 갖는 포기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포기는 당연히 후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것은 뭔가 부정적으로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수용을 통해서 좀 더 겸허한 자세로 삶을 다시 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한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어떤 것의 끝 지점에 다다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깊은 병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랜 노동의 시간을 보낸 후에 직장에서 퇴직하고 삶의 여유를 찾기 시작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잘 운영하던 사업체가 쫄딱 망해버려서 망연자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너무 사업이 잘 되서 과거 그 어느때 보다도 더 높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바로 그 때가 가장 사업이 잘 되는 순간이고 곧 사업의 하강기에 접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지금 그가 운영하는 사업의 정점의 끝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그 끝이 있고, 끝이 나면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된다. 이렇게 끝은 바로 시작이다. 시작과 끝은 종이의 양면이다. 종이의 양면은 모두 종이다. 따라서 시작과 끝은 한 몸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시작 속에 끝의 씨앗이 심어져 있듯이 끝 속에는 또 다른 시작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새로운 시작으로 가는 문 말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유한성, 즉 어떤 것에 끝이 있음을 인정할 때 유한성 속에 내제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씨앗이 비로서 발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상황을 긴 과정의 한 단락으로 보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유한과 무한의 개념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위치한 단계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 때에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와 비로서 거듭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수한 인간 군중 속에 포함된 범죄자 그리고 죄인을 모두 없애거나 피할 가능성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우리 자신 만이라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범죄 행위 그리고 죄의 양상이 있겠지만 단순하게 탐욕과 욕심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거짓에 물드는 일만 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의 끝에서 큰 후회나 자책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깔끔하고 산뜻하게 유한한 삶을 마치고 또다른 미지의 시작을 위하여 죽음의 문턱을 편안하게 넘어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유한성을 受容하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고 미래 지향적인 삶의 형태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수용은 곧 변화에 대한 적극적 받아들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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