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들과 지내다 보면 그들의 사정이나 행위에 대하여 아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이랬으면 좋겠고 저럴 때는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조언을 주고 받는다. 가족 간에도 '조언'은 난무한다. '조언이 오간다'가 아니라 '난무(亂舞) 한다'라고 쓴 것은 조언의 이중성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즉 조언은 도움이 되려는 말이지만 정작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난무(亂舞)는 어지럽게 추는 춤을 의미한다. 조언을 전하는 말이 '난무'의 형식을 취한다면 그 모습은 그리 볼만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효과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난무하는 조언'은 함부로 말해진 불필요한 말이지 결코 조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불필요한 말이기만 하면 그나마 문제가 덜 된다. 있어서는 안되는 말일 경우가 문제다. 있으나 마나한 것은 그 존재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있으면 악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우리가 하는 조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해서는 안되는 조언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조언(助言)은 상대방에게 어떤 상황에 대한 의견을 전해서 그가 더 잘 깨우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타인을 깨우치게 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렵다. 그 대상이 어른이건 아이이건 간에 말이다. 왜냐하면 조언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바꾸기 어려운 고정관념도 있고 조언을 하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상대방 만의 사정도 있기 때문이다. 섣불리 조언을 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하지 못한 조언은 조언의 역할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아픔만 크게 만들곤 한다.
이런 어려움 때문인지 나름 조언을 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조언을 받아 본 사람들은 이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삶을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조언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누군가로부터 정말 피가되고 살이 될 정도로 금쪽같은 조언을 받았을 때를 상기해 보기 바란다. 그때 진정 그 조언을 받아들였는가?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매번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조언을 많은 사람에게 들었지만 대부분은 공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와 같이 누군가를 위한 조언이 조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먼저 조언의 전달자가 딱히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되지 못할 경우가 그렇다. 본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언을 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공부를 정말 잘 하지도 않았던 부모가 자녀에게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권위적으로 조언'하는 경우이다. 이때 아이들이 진정으로 부모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부모의 '조언'은 거의 비난과 꾸지람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비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 낮아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로 이어지곤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조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비난과 꾸지람일 뿐인 그 이야기를 듣는 자녀에게는 결코 진심으로 닿을 수가 없다. 집에서 책 한 권 읽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으면서 자녀의 독서를 권장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그런 말을 할 최소한의 자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조언하는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 조언자인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이 담긴 따뜻한 조언'도 해서는 안되냐는 식의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매우 동의한다. 그들의 조언이 진정으로 '애정이 담긴 따뜻한 조언'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비난과 꾸지람의 형식으로는 따뜻한 부모의 애정을 담기가 매우 어렵다. '사랑의 매'도 같은 이유로 나는 별로 권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는 '사랑의 매'가 거의 통용되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하니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무조건 포용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내 생각에 부모의 조언이 자녀에게 정말 조언이 되려면 전달되는 언어 속에 부정적 감정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부정적인 내용이 전달될 때에도 '사실'의 전달에 집중해야지 거기에 감정을 넣게 되면 더 이상 조언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정말 엉망인 성적을 가져왔을 때 감정을 제거하고 덤덤하게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하여 담백하게 자녀와 의견을 나눌 정도로 중심이 잡히고 냉정한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일단 성적표를 보자마자 화가 나고 당혹감을 느낄 가능성이 클것이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조언을 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두 번째는 조언을 하는 사람의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타인에게 불필요하고 불완전한 조언을 할 경우이다. 누군가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조언을 받을 상대가 처한 입장 그리고 그간 그가 해온 행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그래도 네가 더 잘해야 한다. 그동안 해 왔던 것 보다 더 신경을 써 봐라' 라는 식의 어법은 듣는 이의 화를 초래할 뿐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친한 사이인 경우에는 그래서 더욱 조언을 삼가해야 한다. 조언은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친분이 두터운 경우에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쌓인 친분이나 친숙함 때문에 섣불리 상황을 예단하고 조언의 형식으로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받고 싶은 것은 오로지 위로와 격려일 뿐이지 더 잘해보라는 채찍질은 아니다.
정말 열심히 뭔가 노력을 했는데 결과가 기대 만큼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섣부른 조언을 하면 오히려 조언을 받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 조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좋은 뜻으로의 전달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결국 조언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부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조언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잘못되고 부족한 점을 하나 하나 지적하는 식으로 시작된 조언은 순식간에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비판의 일장 연설로 변하곤 한다. 이런식의 조언은 이미 넘어진 사람을 날카로운 스파이크를 신고 세게 지르밟고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결국 좋은 의도로 마련한 조언의 자리가 영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로 바뀔 수 밖에 없고 조언의 탈을 쓴 비판을 들은 사람은 조언자의 말에 깊게 상처받고 지워지지 않는 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과연 그 사람이 정말 조언을 바란 것일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조언을 구하는 것은 정말 조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순이 자신이
이미 마음 먹은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 조언은 필요하다. 그러나 조언의 본 뜻이 전달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조언은 정말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나의 관점에서 조언이 가능한 유일한 때는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먼저 조언을 구했을 때 뿐이다. 즉 조언을 요청받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할 경우 그건 바로 오지랖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조언을 먼저 구한 사람이 있어서 그를 위하여 어렵게 시간을 내서 부탁을 들어주는 차원에서 조언을 해도 막상 조언을 하면 오히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조언은 부탁을 받고 해도 제대로 전달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요청 받았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꽤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스스로 생각할 때 그럴 자격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의 시선에서는 당신이 자격이 있다고 비추어졌기 때문에 조언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과연 그 사람이 정말 조언을 바란 것일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조언을 구하는 것은 정말 조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순이 자신이 이미 마음 먹은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직에서 상사들이 의견을 물을 때이다. 자신의 의견을 먼저 던져 놓고 나서 팀원들의 조언을 구하는 식이다. 이런 행위는 사실상 십중팔구는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오해하고 정말로 의견을 묻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을 펴면 분위기가 묘해지기도 한다. 특히 어떨 때에는 동의를 넘어서서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전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일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기로 본인이 의견을 내 놓고 팀원의 동의를 구한 후에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팀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식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상사들 중에는 유독 선택적 기억 상실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특히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남김 없이 까먹는다.
물론 상사 보다는 동료나 후배로부터 조언을 부탁 받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도 비록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들은 조언을 구한 것이 아니라 공감과 인정을 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언은 꼭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 때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언을 기대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조언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절대로 섣불리 해서는 안되는 작업이다. 조언은 일종의 가르침이다. 선생님이 한 단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수업을 완벽하게 진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조언의 경우가 그와 비슷하다. 심지어 조언을 구한 사람의 사정 그리고 그 상황과 관련된 배경 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조언을 하게 되면 결국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만 전달할 뿐 제대로 된 조언의 효과는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누군가가 어떤 부분에 대하여 조언을 받는다는 것은 그 부분에 대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런 속성 때문에 조언은 어쩔 수 없이 미량이라도 비판이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동의를 구하거나 면죄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기대하는 답을 주지 못할 경우엔 역효과를 일으킬 가능성 마저 농후하다. 따라서 최선은 조언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조언을 요구 받았을 때에 하는 것인데, 불가피하게 하게 되더라도 그가 기대하는 답변에 공감할 수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특히 유의할 것은 절대로 조언을 할 때 비판과 비난의 언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하여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굳이 꺼져가는 잔불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좋은 면을 찾아서 거기에만 집중하도록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공감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그게 그들이 바라는 진짜 조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