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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May 31. 2024

마요르카 '기쁜 우리 젊은 어느 날' ①

세계여행 에세이: 스페인 마요르카 (1화)

이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 지금, 나는 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눈부시게 기뻤던 며칠간의 이야기를 다시 추억해 본다. 온갖 추억이 규칙 없이 꽂혀있는 먼지 켜켜이 쌓인 책장에서 그날의 이야기들을 찾아 다시 꺼내 읽어본다.


떠나가는 5월의 나불거리는 옷자락을 괜스레 잡아끌며, 책상머리에 앉아 그 며칠간의 이야기를 "타닥탁탁" 키보드 소리로 옮겨 적어 본다. 침묵하던 작은 방 안으로 소리의 파동이 퍼져나간다.




살기 위해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클러버(Clubber) 자격을 얼굴 나이테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를 혐오한다. 클러빙 능력은 그것과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힙한' 클러버에게 어울리는 적정한 나이대는 사실상 존재한다.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비자(Ibiza) 섬으로 갔을 것이다.


이비자에서 놀고픈 의지는 이미 죽었음을 깨닫는다.




후회 따윈 없다. 이웃한 마요르카(Mallorca)에서 순결한 기쁨을 얻은 탓이다.





잔인한 달 10월, 지중해


어디 4월만 잔인하랴. 마주한 10월 또한 그렇다. 정반대의 까닭이다.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지중해로 떠날 명확한 이유다.  


이지젯 항공기가 마요르카 섬의 팔마 데 마요르카 공항에 사뿐히 내린다.


한국에선 5월에나 허락될, 따뜻함과 더움 사이의 기온이 (클럽 전성기를 지난) 내 얼굴과 (머잖아 클럽 전성기를 맞이할) 아이들 얼굴을 터치한다. 때마침 상큼한 바닷바람이 스치자 저마다의 얼굴엔 새순처럼 미소가 부풀어 오른다.


지중해에 떠 있는 수많은 섬 중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쇼팽의 흔적을 쫓기 위함이다. 독일인들이 이 섬을 열애함은 잘 아는 사실이니 밑져도 본전 이상의 리프레시도 보장될 것이다. 애국가의 안익태 선생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Op. 1. 쇼팽

 

팔마 베이 백사장 가까운 Palma Bay Club Resort에 여장을 푼다. 10월 하순 계절의 본질을 잊고, 낯설게 따가운 햇살과 약간의 구름 사이의 밀당을 보아가며 그때마다 옮겨 다니는 수영장들의 대환장 파티다.  


"여기서 더 놀 거야!"


"따라와."


놀고 싶어 눈 돌아가는, 입도 튀어나오는, 아이들을 끌다시피 하고선 깊은 산속 발데모사(Valldemossa) 마을로 향한다.


올리브나무, 아몬드나무, 무화과나무, 오렌지나무, 레몬나무... 사이를 지난다.



카르투하 수도원을 품은 발데모사 전경 (좌측),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를 그린 타일 (우측)



하늘을 꽉 채운 태양이 빛과 볕 둘을 내린다. 햇빛과 그림자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다.


산골에 사는 사람, 그곳에 놀러 온 사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집, 그리고 세련된 오브제 푸른 나무가 한데 어울려 서로서로가 기쁘다 한다. 난치병 같았을 쓸쓸함이 티셔츠에 묻어 몰래 이곳까지 따라왔다면, 햇볕을 쬐고선 저도 모르는 사이 녹아 증발했을 것이다.


아이들 눈동자도 따라서 반짝인다. 떠나온 수영장에 대한 불만은 더 이상 없다. 성스러운 마을이다.


골목길을 따라 집집마다 예쁘기도 하다. 그 사이로, 수호 성녀 카타리나 토마스(Catalina Thomas)를 그린 타일들 또한 예쁘게도 붙여져 있다.  


카타리나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양친을 여의고, 약물 중독에 고통받았다. 열다섯 살에 성령의 환시를 접하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예언의 은사도 받았다. 자신이 예언한 해에 41세로 운명하였다. 1792년에 시복, 1930년에 시성 되었다.





'흉상을 터치하면 행운이 올 것이오, 코를 문지르면 덤으로 더 큰 행운이 깃들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상업적 주문이겠지만, 쇼팽의 반질반질해진 코만큼 뭇사람들의 감사하는 마음만은 진심일 테니, 우리도 행운을 빌어본다.





"아이들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속물같이..."


핀잔을 듣는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분명코 그런 소원은 아니었으리라.)


카르투하 수도원.


'시인과 화가가 이제껏 꿈꾸어 온 모든 것을 자연은 이곳에 이루어 놓았다.'


1838년 11월, 쇼팽은 조르주 상드에 기댄 채, 팔마를 쫓겨나다시피 떠나, 이곳까지 찾아든다. 각혈을 하고, 서른아홉 짧았던 인생의 어느 한 겨울을 나고, 프렐류드 24곡을 완성하고, 이듬해 2월 힘없이 이곳을 떠난다.


산골 수도원에 찾아드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수도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 아름다운 산골 풍경이 그 겨울의 쇠약한 쇼팽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수도원 한쪽 그의 흔적은 '프레데릭 쇼팽과 조르주 상드 뮤지엄'으로 남는다.

 

프렐류드(전주곡) Op. 28, No. 15 Raindrop(빗방울)의 선율에 몸을 기댄다.


그는 마치 호수에 익사한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걸어왔다. 악절 마디마다 무겁고, 얼음과 같이 차가운 물방울이 그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듯했다. (조르주 상드 ‘어느 겨울 마요르카에서’)


피아노 건반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머잖아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은 순간, 하늘이 쇼팽의 가슴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을 흘릴 것 같은 순간에 쇼팽은 정작 무엇을 붙들고 또 무엇을 놓아버리고 싶었을까?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격정을 붙들고, 떨치지 못하는 번뇌를 버리고... 싶다.


10월 하순 발데모사 산골의 햇살은 아직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나도 우리도 모두 다 아름답다.


                    



Op. 2. 낭만


바다내음 달큼할 해변 가까이로 내려간다. 소예르(Soller)에 닿는다. 차를 대충 세우고, 마을 한가운데를 향해 걷는다.


6백 년 넘게 살아온 옛 교회가 우뚝 솟아 겨르로운 여행객까지 보듬고, 옛집들은 부티크 상점이 되고 레스토랑이 된다. 한가로울 공터는 노천카페가 되어, 약간은 따가운 햇살과 짙은 향의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붉은 번개'라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을 가진 나무 트램이 '유유히' 지난다. 저래 봬도, 백 년 이상 저런 모습으로 저런 속도로 이곳의 한 풍경이 되어왔을 것이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볼지 무엇을 먹어볼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무로 된 좁은 트램에 우리 모두 몸을 싣는다.


소예르 나무 트램이 노천카페 곁을 스치듯 지난다.





좁은 골목 벽과 벽 사이를 지나고, 오렌지나무 사이를 지나고, 구름 아래 그늘을 지나고,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아몬드나무 들판을 지난다. 아이들은 기이한 트램과 신비한 풍경 사이에서, 어떤 상념에 사람의 말을 빼앗겨버린 것인지, 정적이 흐른다.


잠깐 하는 사이에 붉은 번개는 소예르 항구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내린다.


해변을 걷고, 레몬맛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Can Quiros라는 레스토랑의 바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타파스 몇 가지로 요기도 해본다.


 



떠나온 마을로 되돌아가는 붉은 번개에 다시 몸을 싣는다. 올라섰다가, 내려섰다가, 하릴없이 시간을 길에다 흘린다. 아깝지 않다.


소예르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 앞 노천카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콜라도 마시고, 물도 마시고, 난 맥주로 늦은 오후의 나른함을 더 노곤하게 해보려 한다.


그 사이에도 우리를 싣고 달렸던 붉은 번개는 어느새 새로운 손님을 찾아 싣고서 우리 곁을 스치듯 지난다. 오래전 일인 것만 같다.


약간은 지친 젊은 엄마 아빠와 힘이 조금은 남은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내일도 햇볕은 따사로울 것이고, 우리는 팔마 베이 해변 백사장으로 나가볼까 싶다.



(마요르카 남은 이야기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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