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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Jun 11. 2024

빈센트, 아름다운 별이... 지다 ①

세계여행 에세이: 빈센트 반 고흐와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1화)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하지만 빈센트, 내가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이가 살만한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걸

('빈센트' by 단 맥클레인)




백과사전 두께의 유럽여행 책자에 달랑 두 페이지. 거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빈곤과 광기로 번민하던 고흐는 1890년 7월, 37년이라는 짧은 생을 여기에서 마감했다.'


딱 그만큼의 관심만 필요했다. 파리 개선문 로터리를 빠져나와 한 시간 남짓, 우아즈 강변의 오베르 마을이었다.


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간 동네 이발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울리지도 않게 벽에 걸렸던 '이삭 줍는 사람들'. 어린 지루함을 달래준 그 화가를 찬미하려 풋내 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인상, 해돋이'에서 시작하여 '수련' 연작으로 이어진 라인업. 다 자란 뒤에는 모네가 좋아졌다.


내게 고흐는 괴짜와 천재를 가르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화가였다. 괴팍했고, 가난했고, 불운했던, 에드거 앨런 포를 떠올려 보면 될 일이었다. 손을 갖다 대기 망설여지는 차갑게 각진 파티션 하나가 그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바라만 보았다.


모네의 집과 정원이 보고 싶어 지베르니를 먼저 찾았고, 오베르는 그다음이었다. 최고의 미술관은 당연하게도 파리 오랑주리였고,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은 그다음의 다음 순서였다.


딱 그만큼의 관심만 가졌다.

 




오베르 시청사에 차를 세웠다. 늑장 부린 봄추위로 양귀비꽃, 튤립꽃 이미 흐드러진 오베르 거리는 싸늘하였다.


고흐의 흔적을 지워버린다면 달리 마음 줄 곳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 고흐가 시작이자 끝이겠거니 여겼다. 붓 터치 과감한 잿빛 구름이 하늘을 죄다 가렸다.



“얘들아, 거기 잠깐 있어봐."


'나, 이곳까지 왔었노라.' 훗날 여행 스토리라도 몇 줄 뻐기려면 문단과 문단 사이에 끼워 넣을 증명사진이 필요하였다. 그런 후에야, 머릿속에 미리 익혀둔, 라부 여인숙을 찾아 나섰다.


봄바람 불어와도 옷깃을 여며야 했다. 움츠린 어깨와 각을 세우며 고개를 들자 바라보이는 풍경의 느낌이 성급하게 변하였다.



"어, 꽤나 정감 있네."  


여인숙 입구 찾기가 어려울 일이었던가. 건물 모퉁이를 끼고돌아 육감으로 무작정 걸어 오르는 길.


고흐는 너덜너덜해진 복부 총상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홍의 피를 틀어막고서, 해부실을 도망쳐 나온 영혼 없는 콥스(corpse)처럼 이 길을 걸어 내려왔을 것이다.



고흐와 나는 내리막과 오르막 중간에서 마주쳐야 했다. 훤한 대낮에 몽유하며 흉몽을 꾸었다.


갑작스러운 과몰입의 이유로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행에 흥이 겨우면 가끔 상황극을 즐겼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저 날씨 탓이었겠다.


때마침 여인숙으로 들어서는 문을 찾아냈다. 쫓기듯 입장권을 샀다.



매표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여기가 아닌가?' 조그만 매점만 덩그러니 자리하였다.


어리둥절 해 하는 사이 점원 아가씨가 나타나서는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듯한 작은 문을 열어주었다. 첫 관문, 두 번째 관문, 다행히 쓸데없이 복잡한 단계별 심사 과정을 별 탈 없이 패스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을까, 많지 않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몸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음산한 기운.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 지금껏 좋은 곳만 골라 다녔나 보다.



마호가니색, 삐그덕 소리가 나지 않는 천박해 보이는 방문을 열었다.


때 묻은 이젤, 채워지다 만 캔버스 조각, 시커먼 마룻바닥에 나뒹구는 물감이며... 내가 마치 동생 테오라도 되는 양 두세 평 남짓 발 디딜 틈 없었을 작은 방안을 미간을 찌푸린 채 둘러보았다.



'정신이라도 온전했었더라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남의 방 구경은 베르사유, 윈저, 쇤부른, 죄다 왕과 왕비의 것들이었음을 상기하였다. 무심하던 여행객의 명치끝 가슴 부위가 간질간질거리기 시작하였다.



눈길 닿는 곳마다 젊은 화가의 말 못 한 고뇌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 하였다. 고흐를 따라온 프로방스의 눈부셨던 햇살은 한없이 쇠락하여 작은 들창에나 어울릴 법한 작은 빛을 들여보낼 힘만 남았나 보다.


아이들은 "방안의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가세요."라던 점원 아가씨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The Sower(씨 뿌리는 사람) (1888)


프로방스 아를(Arles)의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은 고흐에게 예술의 모티브를 안겨준 반면, 점점 심해져 가는 광기까지 얹어 주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생명을 잉태한 씨앗을 뿌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자르기에 이르렀다.


The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 (1889)


테오는 고흐에게 갇힌 방 창 너머 '별이 빛나는 밤'의 풍경을 그리던 생 레미 정신병원과 이별하고, 위급한 때가 오면 훨씬 빠르게 닿을 수 있도록, 오베르로 옮겨와 가쉐 박사의 보살핌을 받도록 하였다.


1890년 5월 20일부터 (37년간 삶이 끝난) 7월 27일까지 70일을 고흐는 오베르에서 살았다.


병들고 지친 인생의 한 순간을 파리 외곽 외딴 마을에 마치 스냅샷처럼 남겨놓은 이 화가는... 해가 뜨면 화구를 챙겨 들고 마을로 나섰고, 어둠이 찾아들면 동생에게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편지란 언어로 말을 건넸다. 70일 동안 7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고흐에게 그림 그리는 일 외에, 편지 쓰는 일 외에, 그 무엇이 남아 삶에 힘이 되었을까.




날 돌보지 못했던 병들고 지친 내 영혼을 깨웠어,

참 미안하고 감사하고 고마워서 말로는 표현 못해도.

온다 온다 온다 내게로 네가 온다, 터질듯한 내 가슴은 너를 외친다.

운다 운다 운다 눈물이 흐른다, 누더기 같은 내 삶을 모두 안아주어서 고맙다.

('온다' by 군호)





하얀 문 너머 (고흐에겐 허락되지 않았을) 은밀한 방이 숨어 있었다. 매점 아가씨가 기계를 작동시켰다.


레퀴엠처럼, 작정한 듯, 특별한 사연 없이도 심금을 울릴 법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카메라가 그린 풍경화 한 장, 그다음은 고흐의 그림 한 장. 대개는 이런 법칙으로, 콥스(corpse)처럼 창백한 파란색을 입힌 은밀한 갤러리 벽면 위로 영구 박제된 고흐 영혼의 파편들이 쉴 새 없이 부딪혔다. 그래도 꽤나 많은 고흐 그림들을 보아 왔을 터인데, 이상하다 싶은 컬렉션의 낯선 그림들이 불꽃 런웨이를 트로트로 걷는 것처럼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내 사라져 갔다.


First Steps, after Millet (1890)


"그림이 더 아름답네."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바로 그때, 아주 많이 낯선, 부드럽고 포근한 색채의 그림 하나가 창백한 벽면 위로 떠올랐다. 기억은 강제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는 어찌할 방도가 없이 괜스레 멜랑꼴리 해 져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첫 걸음마'였다.


저 농부는 바로 '나', 저 어린아이는 바로 '내 아이', 둘 사이의 몇 걸음치 공간에 살아서 박동하고 있는 건 바로 '나의 사랑', '내 아이의 행복'이었다. 찰나의 공감이었다. 서른일곱의 천재 화가 고흐는 끝내 저 농부가 되지 못했고, 저 아내를 맞이하지 못했으며, 저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였다.


나의 그리움과 고흐의 비통함이 정면으로 부딪히며 터져 나온 파편들이 심장까지 날아와 무자비하게 박히고 있었다. 10초도 못되어 사라진 낯설었던 그림 하나 때문이었다.


First Steps by Millet (1858)


나중에 알았지만, 고흐는 동생이 정신병원으로 보내온 밀레의 '첫 걸음마' 사진을 보고는 “숨 쉴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라고 했고, 그 감동을 자신의 그림으로 옮겨 그렸다. 그가 죽은 해였다.


"(고흐의) 이 그림을 조우하면 삶에 대한 의지, 애틋한 연민, 소박한 행복감이 몰려오면서 ‘울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성운 화가)




"고흐가 왜 자살을 해야 했는지 알 것 같아. 영혼을 죄다 그림에 빼앗긴 탓일 거야."


슬라이드가 모두 끝이 나고, 우리네는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병들고 지친 영혼의 마지막 정거장'과 같았을 라부 여인숙 은밀한 방안에, 점원 아가씨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한참을 흐른 듯했다. 오베르에 도착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까마귀 나는 밀밭'을 찾아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라부 여인숙을 나서기 전에 매점에서 첫 걸음마 마그네틱을 하나 구입하였다. 점원 아가씨의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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