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화원에서 사 온 스노우 사파이어에 꽃이 폈다. '꽃이 피는 풀이었어?' 어딘가 카라를 닮은 모습에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고, 카라를 닮았으면 고양이한테 안 좋은 거 아닌가 걱정도 됐다.
그래서 검색을 했다. 그런데 스노우 사파이어의 꽃은 잘라주어야 한단다. 잎이 잘 자라는 걸 방해할 뿐 아무런 기능(?)도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름 매력적인데 필요 없는 아이였구나. 그럼 잘라줘야지.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의외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가지치기를 잘 하지 못한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잎이 없기 때문이다. 다들 저마다 열심히 잎사귀를 내고 꿋꿋이 성장하고 있는데 저걸 어찌 자른단 말인가.
꽃은 다르다. 꽃을 오래 보기 위해선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줘야 한다고 어디선가 배우곤 물 갈아줄 때마다 줄기를 자른다. 그 줄기 위에 피어난 꽃을 위한 거니깐.
그런데 화분에 있는 식물은 또다르지 않은가. 작은 화분의 흙 속에서 살아보겠다고 화분에 맞춰 뿌리내리고 잎 하나하나를 열심히 내고 있다. 멋들어진 모양이 아닐지언정 그것 자체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눈 내린 잎이 멋진 스노우 사파이어
그래서 나는 시들어가는 잎이 아니라면 굳이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 지금은 죽었지만 율마를 키울 때도 모양을 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도 충분히 멋있었으니깐. (초보 식집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잎을 위해 꽃을 자르라니. 조금은 잔인하단 생각이 들었다. 며칠 더 꽃을 두고 보기로 했다. 열심히 피어난 (피어났다는 표현이 안 어울리는 꽃이지만) 꽃이 조금이라도 그 삶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
스노우 사파이어의 꽃. 꽃을 감싸고 있는 초록잎 덕분에 어설픈 작은 카라꽃 같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카라꽃의 암술 같았던 하얀 꽃은 갈색 빛으로 변했다. 마치 이제 생명을 다한 것처럼.
이제 잘라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나는 미련 없이 꽃대를 잘랐다.
스노우 사파이어의 꽃대를 자른 그날.
나는 그동안 놓아주지 못했던 몬스테라 잎을 잘랐다.
몬스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나의 몬스테라는 2021년부터 나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내가 힘들 때마다 늘 희망이라는 새 잎을 내며 나를 붙잡아준 몬스테라는 어느 날 큰 상처를 입었다.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잎들은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갔다.
꼭 흉터를 안고 사는 사람처럼.
몬스테라를 볼 때마다 몬스테라가 상처 입었던 날이 생각나서 잘라내야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명력에 나는 자를 수가 없었다.
다시 새 잎을 내지 못할 것 같았던 몬스테라는 그렇게 흉터를 안고 새 잎을 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새 잎은 찢어지지 않은 잎이었다. 내가 화원에서 이 몬스테라를 고른 이유가 딱 한 장의 찢어지지 않은 잎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몬스테라는 누구나 찢어진 잎을 매력을 꼽고, 어떻게 찢어진 잎을 내는지 누구나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저 찢어지지 않은 잎 때문에 팔리지 않을 것 같고 내가 사줘야 할 것 같다는 측은지심 비슷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랑했던 찢어지지 않은 잎은 상처받던 날 생을 다했다. 그런데 상처를 딛고 일어난 몬스테라가 낸 첫 번째 잎이 그 안찢잎(안 찢어진 잎)이라니!!
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의 감동은 정말이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몬스테라는 세 장의 잎을 냈고, 스노우 사파이어의 꽃대를 자른 그날.
상처 입은 몬스테라 잎 세 장을 잘라냈다. 후련했다.
신기한 그라데이션을 보여준 새 삶의 3번째 몬스테라 잎.
잎을 자른 다음날 일기장에는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다.
가지를 쳐야 남은 잎들이, 뿌리가 더 튼실히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지금 내 삶에 필요한 건 가지치기가 아닐까.
나 자신을 보듬어 주는 여러 가지 방법 중 내가 하지 않았던 방법.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시도하는 방법. 가지치기.
나를 위해 더 깊고 단단하게 살아갈 나를 위해 내 삶의 가지치기를 해보자.
그리고 몬스테라가 한 장의 잎을 더 내는 날 마지막 남은 상처받은 잎 한 장도 잘라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