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 3학년이 되고 드디어 올 게 왔다. 바로, 회장선거! 아이는 회장은 되고 싶은데 연설은 쑥스럽다고 했다. 결과를 떠나 도전 자체가 값지다고 엄마가 도울 테니 해보자고 아이를 격려했다. 아이 스스로 선거를 준비하는 게 이상적이지만…선거 역시 부모의 일이 된다. 학년이 어릴수록 당선 가능성이 어른의 정성과 비례하는 듯 보였다. 유튜브에서 회장선거 연설 꿀팁을 공부한 뒤 아이와 함께 연설문을 작성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공약을 만들고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세웠다. 결과물이 나쁘지 않아 안 그래야지 하는데도 기대하는 마음이 솔솔 자라났다.
준비할 시간은 주말 이틀, 엄마는 마음이 바쁜데 아이는 느긋하다. 오전 내내 뒹굴거리며 친구와의 약속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 원고 암기를 하라고 하니 길어서 종이를 볼 것이라고 한다. 물론, 아이가 완벽하게 암기할 것이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그래도 외우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에 대한 최소한의 진정성을 원했다.
설득이 먹히지 않고 대거리가 몇 번 오가니 슬슬 열이 오른다. 원하는 걸 갖고는 싶은데 노력하기 싫은 건 날로 먹으려는 마음이라고, 그건 사기꾼 심보 같은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고 만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이는 투덜거리며 방 문을 잠근다. 원고를 읽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온다. 몰아세운 뒤 밀려드는 자괴감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또, 자책과 반성 모드다.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강요했다는 자기 객관화에 이르렀다. 회장은 하고 싶은데 원고는 외우지 않는 아이가 사기꾼 심보라면,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사기꾼이다. 일은 하기 싫은데 돈은 벌고 싶고 운동은 귀찮은데 건강은 유지하고 싶다.사실 이 잣대로 보면 세상에 사기꾼 아닌 사람은 없겠지. 오히려 사기꾼 같은 심보가 인간 본성 그 자체가 아닐까. 그걸 알면서도 아이를 혼내는 순간에는 끝내 관대해지지 못한다. (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이를 잡도리한다. 행동 하나에 인생의 향방이 정해지는 것마냥 민감하게 반응한다.
타인에게 완벽함을 원할 자격이 있나요?
미카엘 에스코피에의 그림책 ‘완벽한 아이 팔아요’는 그런 부모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완벽한 아이를 기대할 자질이 충분합니까. 뒤프레 부부는 아이 쇼핑 센터에서 하나 남은 ‘완벽한 아이’를 구매한다. 그 아이는 과연 밥투정을 하지 않고 얌전히 혼자 놀줄도 알고 부모가 TV를 볼 때 혼자 책을 본다. 하교 시간을 깜빡한 아빠를 군소리 없이 학교 앞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아이가 결국 한 번은 울분을 터뜨리고 만다. 엄마 말을 듣고 축제용 의상을 입고 갔다 바람 맞은 날이었다. 축제는 다음주였고 그날은 하필 단체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꿀벌의상이 사진으로 박제됐다. 부모는 아이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구매처에 A/S를 요청한다. 직원은 수리에 몇 달이 걸릴 것이라 말하며 아이의 의견도 묻는다. 새 가족이 마음에 드냐고. 아이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혹시 저한테도 완벽한 부모님을 찾아 주실 수 없나요?” 직원의 대답이 압권이다. “완벽한 부모라고? 참 엉뚱한 생각이구나!”
완벽한 부모는 엉뚱할 만큼 이상적인 개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완벽한 아이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기대하기 어렵다. 이 이치를 모르고 자신조차 해내지 못할, 하지 않을 일을 아이에게 강요하면 괴기스러운 부모가 될지도 모른다.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에 나오는 괴물 아빠처럼. 이 책은 읽다보면 제발 소설이길 바라게 되는 회고록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큰 성공을 거둔 프랑스의 사업가다. 그의 성공은 자식에게는 독약이었다. 성공은 자신의 신념은 틀리지 않는다는 강력한 증거로 이용됐고, 자식을 위한 '특별감옥' 탄생의 재원이 됐다.
아버지는 세상이 타락했다고 믿는 프리메이슨 추종자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멸균된 환경에서 기르기로 마음 먹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난한 광부의 여섯 살짜리 딸을 데려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교육자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하고서야 그녀에게 자기 딸을 낳게 한다. 그 딸은 18살이 될 때까지 집에 감금돼 초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말이 좋아 교육과 단련이지 실제로는 끔찍한 학대였다. 유리창에 살얼음이 끼는 방에서 난방도 없이 지냈고 씻을 때도 찬물만 허용됐다. 안락함은 해로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정신 단련을 위해서는 깜깜한 지하실 한 가운데서 홀로 죽음에 관한 명상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소리를 내면 쥐들이 알아채고 입으로 들어가 몸속 살을 파먹을 것이라는 엄포를 놨다. 물론 아버지는 그 어떤 훈련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자기는 더 이상 단련과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못하면서 남에게는 행동을 요구하는 이중잣대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우선, 모드 아빠 경우 같은 인지오류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른바 자뻑, 나는 완벽하다는 믿음이다. 많은 경우 그 확신은 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이 정도면 괜찮은 부모지, 나 같은 사람은 잘 없지 하는 생각이 들면 냉철하게 '진짜?'라고 되물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쉽게 말할 수도 없다. 그 자뻑이 꼭 흐린 판단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진실을 대면하기 힘들어서, 잘하고 있다고 믿는 회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택한 선택지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주변사람이 힘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죠.)
좀 더 일반적인 이유는 ‘다 너를 위해서 한 일’이라는 명분 때문이다. 엄마는 부족하지만, 부족하기 때문에 나처럼 되지 말라고 이렇게 채찍질 하는 거야! 스스로 타산지석의 표본이 된다. 그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먹히지 않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을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안달이지만... 안타깝게도 자식은 커갈수록 지시자의 언행불일치를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부모의 말에 권위가 사라지는 것이다. 권위 없는 당위는 의미없이 허공을 맴돈다. 우리는 그런 걸 잔소리라고 부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남에게 바라는 것,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남에게도 바라지 것을 공자는 서의 윤리라고 했다. 공자의 넘버원이 바로 서의 윤리다. '논어'에서 공자는 평생 동안 실천할 하나의 행동으로 서(恕)를 뽑았다. 나의 마음이 네 마음과 다르지 않는 상태는 용서의 윤리로 확장된다. '다 이해해, 왜냐하면 나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자기객관화의 윤리적 발현은 괜찮고 관대하고 겸허한 마음이다.
아이는 다행히 반장이 됐다. 선거날 연설문을 틀리지 않게 외워서 말했고 전해진 말에 따르면 그 모습이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고 한다. 연설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뿌듯해하는 아이에게 "원고 외우길 잘했지?"라는 말은 차마할 수 없다. 서의 윤리에 따르면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하지도 못하는 일을 아이에게 강요했던 그날의 내 모습을 용서하지 못했다.
받아온 임명장을 보니 고맙고 미안하고 창피하고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마음이 난리부르스였다.
용서받지 못해서일까. 며칠 안 돼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르고 마는데... (내용은 쪽팔리니까 생략) 자기 흠에는 어둡고 남에게는 당당한 모습이 지치지 않고 놀랍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은, 딱 내 모습만큼만 아이에게 기대하라는 정언명령이었다. 비단 부모자식 간에만 적용되는 원리는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필요한데 놓치고 있는 태도이니까. 이제는 알겠다, 왜 공자가 서를 평생의 과제로 꼽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