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 다비드 칼리 <오랜만이야>
인생이 안개 속에 있는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되는 일은 없고 나아질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우울함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그때 방정리를 하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정리는 실로 현실적인 선택지이기도 하다. 지금 와서 직업을 바꾸겠는가, 몸을 바꿔 끼우겠는가, 로또에라도 당첨될 수 있겠는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집 정리 밖에 없어보인다.
게다가 지금은 비움이 각광받는 시대다. 미니멀리즘의 득세다. 기상천외한 물건이 기함할 만큼 생산되는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갖지 않아야 쿨해 보일 수 있다. 시대를 앞서려면 역행해야 하는 정반합의 묘미다. 정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해보면 알지, 비움은 지독히 힘들다는 것을.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곤도 마리에(a.k.a 정리수납 일타강사)는 말한다.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하라고. 처분 난이도 등을 고려한 순서다. 추억의 물건이 끝판왕인 건 비우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첫사랑과 주고 받은 편지 같은 건 다시는 똑같은 것을 구할 수 없다. 유일무이해서 그 어떤 한정판보다 희소하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를 거치며 만들어졌기에 지난 흔적을 흘려보내면 지금의 나를 흔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오랜만이야’는 추억 처분의 어려움이 잘 담겨있다. 남편은 주말 벼룩시장에 내놓을 물건을 찾기 위해 다락방 정리를 시작한다. 존재를 까맣게 잊었던 물건이 추억을 되살려준다. 어릴 때 치던 북과 타고 놀던 썰마와 목마를 차마 버릴 수 없다. 겨우 선물받은 램프 딱 하나를 들고나와 '정리를 다 했다'는 체면치레를 한다. 과거가 묻어있는 물건은 기억을 잃고 싶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는 소장품이 된다. 우리는 무의 영역으로 덧없이 가버린 지난 날의 추억과 감정을 붙잡고 싶어 물성의 힘을 빌린다. 그게 빛났던 날들에 대한 예의인 것만 같다.
모든 물건을 그러쥐고 살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은 쌓이는데 물건 둘 공간은 한정적인 게 문제다. 특별한 추억이 없어도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이 차지하는 자리도 만만치 않다.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다시 정리 일타강사 곤도 마리에의 말을 빌리면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하지만 설렘이 온전히 내 기준과 필요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SNS나 광고, 뒤처지기 싫은 마음 때문에 설렘은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왠지 필요할 것 같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불행히도 설렘의 지속시간은 찰나처럼 짧다. 물건의 유행과 교체주기는 짧아져만 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을 잘 들이고 오래 유지하는 것은 내가 원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단순한 취향을 넘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물건 수집가야말로 성공적으로 자기를 이해한 인물인 것인가. 여기 편집증적인 한 남자가 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의 케말은 사랑하는 여인이 사용했거나 그녀를 상기시킬 만한 물건을 병적으로 모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는 약혼녀의 선물을 사러갔다 점원으로 일하는 먼 친척인 퓌순을 만난다. 그들은 44일 동안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1970년대 성(sex)에 보수적인 튀르키예 상류층 남성의 관습대로 일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결혼은 계급에 맞는 명문과 출신 여성과, 사랑은 어리고 아름다운 퓌순과. 순진했던 야심은 케말의 약혼식 뒤 그녀가 사라지며 무참히 깨진다. 상사병 때문에 이제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약혼녀와 파혼했고 사랑에 눈 먼 질투 때문에 사업도 손실을 입는다.
1년 뒤 마침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를 찾아낸다. 그녀를 보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기에 구차하게라도 주변을 맴돈다. 돈 많은 '이상한' 친척의 자격으로 무려 8년을 그녀의 집에 방문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 꼴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몰래 그녀의 물건도 슬쩍 가져간다. 인형과 빗, 시계와 비벼끈 담배꽁초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것은 그 무엇이라도 그리움과 고통을 잠재워줄 위로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그녀의 담배꽁초는 자그마치 4213개, 그의 사랑은 지독한 광기였다.
8년의 지독한 기다림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퓌순은 남편과 이혼하고 둘은 새출발을 위해 육로로 유럽여행을 떠난다. 여행 첫날 그들은 반지를 나눠끼고 약식으로 약혼을 한다. 그리고 9년 만에 황홀한 밤을 다시 보낸다. ‘사랑의 고통이 세상의 혼란스러움과 아름다움과 뒤섞여 이성에서 하나가 되고, 이런 총체와 완결성이 깊은 평온을 주는’ 날이었다. 정점에 도달한 사랑은 이제 끝날 일만 남았던 것일까. 바로 그날, 술에 취한 퓌순이 차를 몰다 사고로 죽고 만다. 살아남은 케말은 이제는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여워 아파한다.
그가 고통을 완화시키는 법은 사랑의 방식처럼 특이했다. 어느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고통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단연 수집품이 있다. 꿈 같은 사랑의 시간은 44일에 불과했고 기다림의 시간은 9년이었으니 말이다. 그 9년을 채우고 버티게 한 것은 바로 퓌순의 물건들이었다. 그는 물건에 대한 설명이 자기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한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8년 동안 드나들었던 퓌순의 집을 순수 박물관으로 개조한다. 몰래 음미했던 수집품은 박물관을 채울 어엿한 전시품이 된다.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은 박물관 소장품을 해석하기 위한 도록의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고 이스탄불에는 실제로 소설 속 오브제를 전시한 '순수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있다.
케말이 퓌순과 44일 동안의 밀회를 즐겼던 아파트 이름은 멜하메트, 연민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물건은 그곳에 차곡차곡 모였다. ‘사랑이 커다란 관심과 커다란 연민’이라는 케말의 애정관을 반영한 장치일 것이다. 연인을 향한 관심은 그녀의 손길이 닿는 물건으로까지 스밀 만큼 절절했다. 진작 버려졌을 물건은 관심을 통과하면 수집할 물건으로 승격된다. 특별한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 역으로 그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곧 물건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형태와 깊이가 물성을 빌려 표현될 수 있다. 박물관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그동안 물건이 많으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고 생각했다. 비울수록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고 스티브 잡스의 텅 빈 방 같은 집을 꿈꿨다. 불필요한 것 없는 여백이 가득한 집을 만들면 근심도 사라질 것 같았다. 잔잔한 짐이 늘어나면 화가 났다. 더해진 개수 만큼 나의 혼란과 해야 할 일(짐이 많으면 정리할 것도 많아진다)도 많아진 것이니까. 하지만 물건을 싹 비우고 정리할 것조차 없게 되면 정녕 내 마음도 그처럼 단정해질 수 있을까. 나는 더 이상 유튜브와 책에 나오는 비움의 마법적 힘을 곧이 믿지 않는다. 물건을 버리지 못해 안달하면서도 클라우드의 무한한 저장 공간을 믿고 순간을 놓칠까봐 사진과 글을 밀어넣던 모습을 잊지 않기에. 어떤 식으로든 가지고 남기고 붙잡으며 안정감을 누리려 하는 마음은 좀처럼 비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 남길지를 고민한다. 모델하우스 같은 매끈하고 차가운 공간감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찌할 바를 몰라 절박하게 다 모아둔 백화점을 가장한 난장판도 만들지 않겠다. 마음이 가는 곳을 알고 선택한 수집품들이 모인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박물관의 컬렉션 같은 소유를 꿈꾼다. 물건을 통해 드러나야 할 것은 '없음'이 아니라 선명한 생각과 지향이다. 집은 치워야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나를 드러내고 나이게끔 하는 징표들이 모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반듯하고 깔끔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는다. 좋은 소유는 수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