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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타쿠나 May 15. 2024

노력이 인생을 구할 수 있을까

김영환 <노력의 배신>

작년 11월, 수능을 앞두고 아파트 단지에 응원 현수막이 걸렸다. ‘엄마 아빠는 너희의 노력을 믿어’ 좋은 마음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다른 말로 바꿔주고픈 메시지였다. 나는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은 수험생에 어느새 동일시 됐다. 현수막을 보고 속이 쓰리다 못해 찢어질 것 같다. 수험생활의 진정성 여부는 중요치 않다. 결과가 나쁘면 그저 자책과 자기혐오 밖에 할 수 없다. 왜 더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채찍질 하겠지...


노력과 성적을 직접적으로 연관짓는 건 때론 부당해 보인다. 너무 긴장했거나 전략이 잘못됐거나 공부에 집중할 환경이 안 됐거나, 아니면 별 다른 이유 없이 그냥 못 봤거나. 그런 사정을 통상적으로 운이 없다고 한다. 개별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불운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대개 실패자의 핑계 쯤으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노력으로 불운을 희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많은 가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대지만 노력만큼은 부동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대문호의 성공 비결 :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노력했음!


아이의 그림책도 노력의 힘을 많이들 강조한다. 그 중 특히 기억에 남았던 책과 구절이 있다. ‘마지막 5분’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실화를 다룬 책이다. 도스토스옙스키는 20대 때 러시아 제국을 비판하는 지식인 모임에서 불온서적을 낭독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례대로 가벼운 형에 그칠 것이라 예상했기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소설가는 통탄스러운 마음을 안고 처형 단상에 올랐다. 


황제의 칙사가 갑자기 도착한 건 사형수에게 삶에 인사를 고할 마지막 5분이 끝나갈 쯤이었다. 사형을 취소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보내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애초 황제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저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의 자비심을 칭송하며 다시는 허튼짓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죽다살아난 입장에서 5분은 인생을 바꾸는 변곡점이 됐다. 도스토옙스키는 5분 동안 삶의 참의미를 깨달았던 것 같다. 현상의 참면을 보는 데 부족한 건 절대적 시간이 아니라 절박한 마음이다. 그 후로 그는 삶을 선물 같은 축복이라고 여기게 됐다. 그는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앞으로 1분을 한 세기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림책은 구사일생 한  도스토옙스키가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  <죄와 벌>과 <악령>,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등의 대표작을 썼다고 했다. 이 문구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인생의 어떤 순간이 낭비하는 시간일까. 시간의 질을 평가하는 행위는 사후적이다. 허투루 보낸 것 같은 시간이 의미있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멍 때리고 있다가 ‘유레카’ 같은 발명을 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분초를 아껴가며 시간을 밀도있게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뻘짓’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노력한 결과'는 필연성이 아닌 사후적 해석이다.


본질적인 의문은 노력의 실효성이다. 과연 노력만으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까. 물론 노력 없이 태어나는 작품은 없겠지만 노력은 일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노력하는 모든 사람이 잘 될 수 없다. 그것은 간절히 기도하는 이들의 소원이 모두 들어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노력의 힘이 그토록 막강해보이는 이유는 성공한 이들의 노력 스토리를 주로 듣기 때문이다. 타고난 천재성을 꽃피워준 것정작 노력이었다는 얘기를 들을 우리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날고 기는 사람도 알고보니 같은 우물 안에서 '노력, 노력'하며 점프하는 개구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책을 만든 이들도 대문호의 삶을 노력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았을 테다. 함축과 생략이 그림책의 숙명이기도 하고 심플하게 말해야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사정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위대한 작가도 열심히 살아서 작품을 만들었으니, 여러분도 어쨌든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교훈을 줘서 나쁠 건 없다. 기사회생->회심->노력->성취는 위인을 다룰 때 공식처럼 쓰이는 서사다. 결이 다른 이야기들을 모두 비슷비슷하게 둔갑시킨다는 한계는 있지만, 계속 쓰인다는 건 꾸준히 잘 먹힌다는 방증이다. 노력은 세상을 지배하는 믿음이 되어있다. 


어렸을 때는 희망차기만 했던 노력의 힘은 커갈수록 버겁게 느껴진다. 이뤄야 하는 목표가 엄중해질수록 들여야 하는 노력이 따라 커진다. 대입, 취업, 중산층 안착 등의 관문을 거치며 이만하면 열심히 했지 싶은데 자꾸 실패한다. 승자는 더 지독한 타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데 삶에서 나아지는 부분은 없는 것 같다. <노력의 배신>의 저자인 심리학자 김영환은 이런 우리 사회를 ‘노력 신봉 공화국’이라고 칭했다. 


그놈의 노력, 노력, 노력!


그는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말하는 책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교수답게 각종 과학적 데이터를 들이밀며 타고난 재능을 노력이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장담한다.

노력의 효용성에 회의적인 이유는 일단 노력 자체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은 노력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재능에 따라 노력의 양이 영향받고 결정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성과가 좋아보이는 건 ‘인과관계를 착각한 인지적 오류’다. 잭 햄브릭 미시간주립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특정 분야에 재능 있는 사람이 그 분야에 더 많이 노력한다. 재능이 있는지를 어떻게 확인하고 수치화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어떤 맥락인지는 이해간다. 잘하는 분야가 있으면 그 일이 재미있어지고 재미있으니 더 몰두하는 선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재능의 차이가 명백히 있는 경우 노력은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한다. 재능있는 사람이 노력할 때 효율이 크고 성과가 더 좋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능-노력 상호작용’ 효과다. 같은 양의 노력을 기울인다 치면, 보통 사람은 걸어갈 때 재능있는 사람은 뛰어가는 격이다. 그 격차를 좁히는 법은 시간을 더 투입하는 것일 뿐인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유한하다.


노력은 의지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으로 하는 겁니다


저자는 성공의 3요인으로 재능-배경(집안의 사회경제적 위치)-노력을 꼽는다. 재능과 배경은 타고 태어난 것이라 복불복이고 운이다. 자유의지로 뒤집을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어보인다. 우리가 노력을 칭송하는 이유다. 무심하게도 저자는 그 노력조차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라고 일갈한다. 노력의 핵심은 끈기와 성실인데, 이것은 선천적인 기질의 영역이다. 성격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와 같은 범주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노력이 재능의 대항마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둘은 같은 편이었다.


책을 읽고나면 좀 암담하다. 노력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사회의 압박도 싫지만, 노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맥 빠지는 소리도 싫다. 타고난 대로 살라는 말 같아 신분제 사회의 기시감마저 든다. 하지만, 저자는 그래서 노력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역으로 말한다. 일단 제대로 해봐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리조리 피해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고 노빠꾸 직진하는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청량감이 있다.


중요한 건 재능이 없을 때, 내 길이 아닐 때 쿨하게 떠날 수 있는 결단력이다. 노력하면 언젠가는 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시간을, 자원을, 건강을, 삶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모두가 다 노력하는 사회라 자칫 오버페이스 하기가 쉽다. 그러다 몸도 마음도 골병들고 너덜너덜해진다. 번아웃과 우울감과 패배의식이 왜 이토록 사회에 팽배해 있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좌절감을 두려워 할 필요없다. 사람은 제각기 타고태어난 것이 다를 뿐이다.  


현대인에게 노력은 희망이고 종교이다. 더 나아질 것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인간을 구출해줄 유일한 동앗줄이다. 그것은 미래가 나아질 것이라는 긍정의 주문이자 기도다. 타고난 재능과 운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믿음이 팽배하면 사회는 공황상태가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성공이 사회에 진보와 발전을 가져와도 그 가치는 평가절하될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질투와 비아냥만이 있을 뿐이다. 


성공을 거머쥔 입장에서도 노력의 힘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노력은 그들에게 윤리적 정당성을 준다. ‘저 만큼 노력한 사람 있나요?’라는 말에 대중들은 숙연해진다. 그의 배경과 재능과 요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입을 닫고 존경과 선망의 눈길을 보낸다.


그럼에도 노력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다는 믿음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해롭다. 노력을 만능열쇠로 여기는 사회는 실패의 궁극적 책임을 개인 탓으로 돌린다. 노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획일적인 것도 문제다. 많은 이들이 등수와 서열을 줄 세울 수 있는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고 믿는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레이스에 뛰어드는 선수가 사실상 정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합격의 혜택이 큰 시험일수록 문턱은 좁다. 오랜 기간 큰 비용을 들여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 이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은 거의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절차가 공정해도 운동장 자체가 이미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같은 사람은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정하자는 제안까지 하지만...현실에서는 사고실험처럼 보이는 주장일 뿐이다. 


<노력의 배신>은 얼핏 노력 무용론을 말하는 것 같다. '재능 앞에서 노력은 죽을 쓴다'. 태도가 강경하고 단정적인 것에 반해 논리가 엉성한 부분도 있다. 나는 그것을 주장의 불완전성 보다는 오죽하면이라는 진정성으로 읽었다. 극약처방을 내리는 심정 같달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애쓰지 마세요, 자신을 해칠 만큼 내몰지 말아요, 뭐 안되면 어때요'가 아니었을까. 어린이 전집부터 일상 공간에 걸리는 현수막까지 죄다 노력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반대되는 말을 하려면 결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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