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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타쿠나 May 08. 2024

책육아의 아웃풋은 수능 국어 1등급일까?

비어만 <책 먹는 여우>,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고등학교 때 수학학원을 같이 다닌 남자애가 있었다. 언어영역만큼은 공부를 안 해도 거의 만점을 받는 신기한 아이였다. 언어가 취약했던 나는 그 아이가 부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점수를 잘 맞아?" 하고 물으니 그냥 답처럼 보이는 걸 찍으면 정답이라고 했다. (대체 그게 말이야 방구야) 비결을 따라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따라할 수 없다는 걸 얼마 안 가 알게 된다. 선생님은 그 아이가 판타지 소설 덕후라는 사실을 귀띔해줬다. 부모님이 따라 다니며 책을 빼앗아야 할 만큼 판타지 소설에 푹 빠져 지냈는데, 그렇게 주구장창 읽다가 글읽기에 도가 트였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알고보니 주변에 오타쿠 취향 덕분에 수능 국어를 거저먹은 이들이 꽤 있었다. 판타지, 역사, 추리소설 등에 꽂혔던 시절 덕분에 요샛말로 문해력을 꽃피운 것이다. 아,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을지도. 그런 취향은 성인이 돼도 그 장르의 웹소설을 보거나 한정판본을 사들이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취향과 덕력 정도가 돼야 글눈이 뜨이나 보다.


요즘 육아의 최고봉은 책육아다. 다들 열심히들 한다. 아이 등원길에 유모차를 밀면서 책 읽어주는 엄마까지 본 적 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머리도 습득할 수 있다니 나부터 벌써 혹한다. 그래서 책육아의 성공 여부를 어느 대학에 진학했는지로 최종 평가하는 흐름이 있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대학간판은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 부연설명을 더할 필요 없어 효율적이다. 간판 없이 얘기하면 생각과 주장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우리는 '그럼에도'에 관한 서사보다는 (명문대학을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의 이야기를 (이렇게 했더니 00대학 갔죠!) 듣는 데 익숙하다. 


대입의 치트키가 될 만한 내공을 갖추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어떤 깊이로 읽어야 할까. 솔직히 책을 어지간히 읽어도 본래 능력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경험으로 안다. 오버해서 말하면 책과 내가 하나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해야 얻을까한 목표다. 부작용(?)은 그 지점까지 가면 입시가 뒷전으로 밀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 미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친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책 좀 그만 읽으라고 쫓아 다니며 빼앗아야 할 수도 있다. 그쯤되면 독서는 습관이자 욕구다. 그것은 편의 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패치가 아니다. 


<책 먹는 여우> : 읽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프란치스카 비어만의 <책 먹는 여우>는 독서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잘 묘사한 책이다. 징~허게 읽은 인간이 어떤 존재로 거듭나는가 라는 주제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기발하게 풀어냈다. 주인공 여우는 책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 책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의 양식이다. 다 읽은 책은 꿀꺽 삼켜 몸에 흡수시킨다. 책 사느라 세간살이마저 다 팔아낸 여우는 급기야 책을 훔쳐먹다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 무엇도 읽고 먹을 수 없는 상태는 여우에게 가장 큰 형벌이었다. 


여우는 역시 영리한 동물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읽을 책이 없으면 직접 책을 쓰면 된다. 교도관을 꾀어내 종이와 연필을 얻어 일필휘지로 소설을 써내려 간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교도관이 직장을 관두고 직접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낼 만큼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여우는 큰 유명세를 얻으며 자신의 책을 가장 맛있게 먹는 대작가가 된다.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다. 여우는 얄미우면서도 처량하고, 기민하면서도 느긋하다. 

인간은 먹는대로의 존재라는 비유가 여우에게는 글자 그대로 적용된다. 책을 먹어냄으로써 그 자신이 책이 되었다. 이 행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무한한 증식이다. 책읽기에는 끝이 없었다. 여우의 말대로 읽으면 읽을수록 더 원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읽지 않는다. 읽을수록 까다로워진다. 예전의 낮은 단계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성이 두 번째 특징이다. 도둑이 되기 전 여우는 광고지나 무가지를 먹으며 어떻게든 연명하려 했지만 영양실조에 걸리고 만다. 여우의 상태는 단순한 활자중독이 아니었다. 양서를 먹지 않으면 안 먹으니만 못한 몸이 됐다. 


내면에 켜켜이 쌓인 책들은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기존의 책을 자양분 삼았지만 답습하지는 않았다. 여우의 몸을 통과한 이야기는 여우만의 것으로 변화했다. 그 이야기는 있는지도 모르게 똬리를 틀고 있다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한 번씩은 꿈꿔볼 만한 체험이지만 이건 계시와 우연, 재능과 운의 영역에 가깝다. 


대부분의 독서가는 이야기꾼으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그저 잘 살아내거나 견디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보상이나 결과를 구하지 않는 행위다. 짊어진 짐이 무거워 책에 기대어 취하는 잠깐의 휴식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내기 힘든 순간과 인생이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 책이 만들어주는 파라다이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는 구원으로서의 책의 힘을 보여준 소설이다. 주인공 한탸는 35년 동안 체코의 폐지압축공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압축하는 책의 문장들을 술을 홀짝대며 음미하듯 모세혈관까지 스미게 한다. 한탸가 일하는 먼지 가득한 지하실은 니체, 헤겔, 노자 등 온갖 사상가와 철학자가 모이고 진귀한 서적이 세상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공간이다. 한 달에 2톤의 책을 압축하니 35년이면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존재가 되었다. 


책을 읽을 때만큼은 공장의 열악한 환경도 문제되지 않는다. 지하실을 가득 채운 먼지와 굉음, 도살장의 피 묻은 종이가 풍기는 구역질 나는 냄새와 온갖 벌레떼도 몰입을 막을 수 없다. 고독 속에 몸을 숨기고 시간을 잊는다. 그에게 책은 마법이었다. 막장 같은 환경을 더 없이 숭고한 공간으로 바꿔준다. 하지만 그것은 유효기간이 있는 천국이었다. 시대는 바뀌고 열 배나 효율이 좋은 압축기계가 등장하고 만 것이다. 오래된 한탸와 그의 기계는 더이상 쓸모가 없다. 그는 이제 인쇄소로 옮겨가 백지나 꾸려야 할 처지다. 백지에는 홀짝거리며 읽어낼 문장이 쓰여있지 않다. 그런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이 낫다. 그는 스스로 압축기계에 들어가 책과 한 몸이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책에서 진정과 위안을 얻으려 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죽음은 그에게 승천이었다.


책먹는 여우와 압축공 한탸는 독서로 만들어지는 인간형의 표상이다. 여우는 독서가 주는 혜택을 최대치로 누리는 인물이다. 책으로 부와 명예를 얻는다.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안다. 다만 작은 과실이라도 얻으려는 마음을 포기 못할 뿐이다. 부모들이 책육아를 하는 이유다. 공부머리를 얻으면 감사할 일이고 박식함이라는 매력자본이어도 만족할 일이다. 세상이 인정할 만한 성과로 독서의 효용이 나타나면 된다. 


반면 한탸는 소득을 바라지 않고 독서하는 삶을 비유한다.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폐지업자가 하는 철학 공부는 무슨 소용일까. 헤겔을 논하고 에라스뮈스를 아는 게 먹고사는 데 어떤 도움이 되냐고 반문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올 수도 있잖아요!!!) 이런 관점이 힘을 얻을수록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게 된다. 효용을 측정할 수 없으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탸의 독서는 숫자나 구체적인 형태로 쓸모를 증명할 수 없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 독서는 암흑에 있어야 명확히 보이는 꺼지지 않는 빛이다. 


둘 중 어떤 독서가가 될지 선택할 수는 없다. 길을 가르쳐주는 명확한 지도는 없다. 해봐야 알고 안착하고서야 자신의 위치를 알아차릴 뿐이다. 다만, 확실해보이는 건 한탸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 없이는 여우의 자리에 닿을 수 없다는 점이다. 독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몰입이다. 과실만 골라 먹을 방법은 역시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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