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최근에 나는 대기업에서 퇴직 후, 중견기업에서 3년 정도 사장으로 일 했던 A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A는 과거 내가 기억하던 중후한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졌는데, 특히 정장이 아닌 청바지 차림이나 양처럼
순해 보이는 눈빛 등 한마디로 편한 '동네 아저씨' 모습, 그 자체였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A는 활짝 웃으며 "유민 씨, 이제는 백수예요.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마음도 편안해요"
라고 말했다. 나는 A가 왜 대기업 퇴임 후, 다시 중견기업 U사에서 다시 일할 결심을 했는지? 궁금했다.
A는 평소 알고 지냈던 U사 오너가 '재능 기부'를 좀 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대기업을 다니면서 걸렸던
'일 중독'이라는 불치병(?)에서 완전하게 치유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고, U사에 입사하는
것이 마치 '고속도로를 지난 후, 국도를 달려 고향집에 가는 여행'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는 A에게 U사에 입사 후, 첫 번째로 느꼈던 소감을 물어보았다.
A는 뜻밖에도 본인이 사장으로서 '어떤 업무를 어느 정도까지 할 것인지?' 고심을 많이 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중견 기업들은, 모든 업무를 오너가 관장하면서 실무자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형태로
일하기 때문에, 본인이 '바지 사장'의 주제를 모르고 업무 지시를 남발했다가는 내부 혼란만 가중시킬
거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또한 A가 존경하던 선배로부터 "오너가 있으니 경영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라'라는 꿀팁도 미리 받았다고 했다.
예상했던 소감이 아니어서 좀 당황했지만, 나는 두 번째로, U사를 퇴직한 후 가장 후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았는데, A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 였다고 했다.
A가 장황하게 설명해 준 U사의 당시 경영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가 입사한 당시, U사는 대규모 영업 적자가 수년간 지속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U사 주가 총액이 기존 평균치보다 2배나 증가된 상태였고, 덕분에 주식을 담보한 자금 차입을 하면서
계속되는 재무적 위기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고 했다.
이 상태에서 1년쯤 경과한 시점에, 시장의 Bubble이 꺼지면서 U사 주가도 하락하기 시작하자,
은행권을 포함한 채권단들이 상환 만기된 부채의 기간 연장을 거부하거나 10% 이상의 고금리로
재계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자금경색이 점차 심화되자 도미노 현상처럼 모든 Cash
Flow에서 병목(Bottle-neck) 현상이 발생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U사의 재무 상황이 계속 최악으로 치닫자, 오너는 본인이 소유한 대주주 지분을 담보로
다시 새로운 투자사(FI) 자금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A는 오너에게 '손익 중심의 사업 구조로 재편'하는 방향성에 대한 의견을 드렸다고 했다.
즉, 매출규모가 줄어드는 시점이므로 영업 손익을 개선하기 위해, 수주 단계부터 철저히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익이 나는 프리미엄급 제품 위주로 선택적 수주를 하자는 것과, 영업 손익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인 고정비와 변동비 절감을 위해 사내 인적자원과 인프라 규모를 과감하게 구조 조정하는 작업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IMF 위기극복 등 오랜 사업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오너는 "경영은 산수가 아니라 수학이다"라는
의견과 함께, A가 제안한 '생존 경영' 방식을 반대했다고 한다.
오너는 자금 확보를 통해 2~3년만 잘 버티면 다시 매출확대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현재 상황을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2년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는데, 불행하게도 기대했던 시장의 활황은 다시 오지 않았고,
그 결과로 U사는, 만성적인 영업적자로 인한 주가 하락 및 경영권을 양도해야 하는 위기까지 내몰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왜 A가 오너에게 좀 더 직설적인 의견을 계속 제시하고 이를 통해 회사의 혁신적인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A는 나의 질문을 듣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유민 씨, 내가 U사 퇴직 후 가장 후회했던 것이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했죠?
만약 시계추를 돌려서 3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했을 거예요.
결국 소신 있게 행동하지 못했던 제 자신의 문제도 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다른 U사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CEO risk'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U사 오너는, 창업 이후 영업부터 재무, 인사, 개발 및 제조까지 모든 분야를 수십 년 동안 본인의 판단
대로 잘 이끌어 온 분이에요. 마치 슈퍼마켓의 주인처럼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사업 규모가 작았던 초창기에는,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오너의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을 통해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을 거예요. 그런데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기 시작하면, 오너가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되죠. 그래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보고를 받고, 다시 오너가 판단한 후,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실행력은 조금씩 늦어지게 되죠. 특히 전체 분야를 잘 이해하고 있는 오너를
설득하려면 Fact 보다는 오너가 좋아할 내용 중심으로 보고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거든요.
오너가 똑똑하고 디테일에 강할수록, 보고 및 의사결정하는 시간이 지연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U사 경영의 변곡점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슈퍼마켓이 월마트처럼 크게 성장하려면, 각 분야의 책임자가 오너처럼 의사 결정하고 실행하도록
'권한 이양'이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 책임자들의 실적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보상도 꼭
필요하죠. 그런데 권한 이양을 못하면, 책임 경영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은 점차 떠나고, 오너의 눈치를
보면서 지시한 내용만 실행하는 사람들이 점점 오너 주변에 모이게 됩니다.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신속하게 결정해야 할 일은 많아지는데, 이 상태가 계속되면, 오너는 많은
것을 놓치기 시작하고, 점차 판단력도 흐려지죠.
그리고 오너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주변의 임직원들도 오너에게 나쁜 소식은 제외하고 칭찬받을
일만 골라서 보고하는 '학습화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회사는 변화를 통한 혁신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슈퍼마켓 운영에 만족하고 있다가, 월마트와
같은 경쟁사가 등장하게 되면, 사업의 경쟁력을 계속 잃어가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U사 오너는 집단지성의 힘보다는 본인의 판단을 더 중시한 경영을 한 거예요."
A는 지난 3년 동안 오너에게 주기적으로 여러 가지 의견을 말했지만, 오너는 매번 보고를 받은 후,
같이 밥 먹자는 이야기만 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오너는 본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판단을
더 중시했고, A가 제안한 새로운 변화와 혁신에 대해서는 불확실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시점에, 오너는 A에게 '겨울이 오고 있다'라는 시그널을 주었고 A는 이후
몇 개월 동안 U사에서 그의 존재를 완전히 지운 다음, 매화꽃이 필 무렵, A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던 고향집으로 갔다고 했다.
A와의 인터뷰를 곰곰이 복기해 보면서, 나는 A가 가졌던 대기업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환경이 다른
중견기업에서는 얼마나 물거품처럼 하찮은 것이었는지, 그리고 오너의 중요성이나 일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정글처럼 무서운 기업 생태계 내에서, 최상위 포식자 5% 정도의 회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견기업 내 임직원들은 매 끼니를 걱정하며 항상 불안에 떨면서 쫓겨 다니는 초식동물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약 새롭게 취업 또는 이직을 할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먼저 다양한 커뮤니티를 통해
본인이 근무할 회사 CEO의 비전과 성품, 그리고 risk에 대해서도 충분히 확인한 후 결정하시기를
권유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