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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쟁이 Jun 10. 2024

#3. 쌀알 만큼의 용기

 맘 속에 있는 말을 삼키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려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생각하는 것이 버릇이 된 나라서. 늘 입을 떼기가 망설여졌다.     


다른 영역은 다 괜찮게 봤는데, 수리영역에서 평소보다 점수가 많이 떨어지는 바람에 수능을 망쳤다. 첫 장을 넘기자 마자 바로 막혔다. 까만건 숫자고 하얀 건 종이더라.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문제가 제대로 읽히지가 않았다. 친한 후배가 답이 생각이 나지 않으면 숫자를 써놓고 굴리라며 연필과 지우개를 선물로 줬는데, 애꿎은 연필과 지우개만 요리조리 굴려댔다. 공부를 안 해도 점수가 잘 안 나온다며 요행을 바란 나에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담임 선생님은 원서 상담을 하러 오신 어머니께 평소 실력이 아까우니, 한 번 더 도전해 보는 게 좋겠다며 oo대에 걸어놓고 재수를 하라 권하셨다. 신문에 나와 있는 대학별 커트라인과 내 점수를 비교해 보니, E대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해보면 어떨까하고 말씀드렸지만 아빠는 여대라고 허락을 해 주시지 않으셨다. 무엇이 되겠다는 정확한 목표 없이 그저 좋은 대학교에 가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던 나였기에, 점수가 제대로 안 나온 이상 어디로 지원한 들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담임 선생님 조언대로 OO대에 특차로 원서를 썼지만 부모님은 재수를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엄마 아빠는 속속들이 모르고 계셨던 기숙사에서 성실하지 못했던 내 생활도 내심 찔렸고, 재수하고 싶다는 내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어색하고 두렵기만 했던 나라서 그저 엄마 아빠 말씀을 따랐다.      


같이 기숙사에 있었던 친구들도 대부분 입시에 실패했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친구들은 재수를 해서 그 다음 해에 원하던 대학. 원하던 과로 모두 다 입학했다.     


‘원하지 않는 곳에 와서, 왜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부모님께 하지 못하는걸까?’

어쩌면,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가 눈치채 주시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적성이란 게 어딨어. 그냥 환경에 맞춰서 사는 거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대학교 다니는 내내, 저 깊은 곳에 마음을 감춘 채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와 틈만 나면 싸웠다. 원해서 온 거였다면, 적응도 잘 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만 ‘이방인’ 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ㅇㅇ대를 안 갔으면 어디 갈라고? 여기 말고 다른 곳 갔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나? 여자 직업으로 그만하면 괜찮지.’     

엄마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듣고 보니, 엄마 말씀이 맞는 것도 같았거든. 정말 다른 길을 가고 싶은데 부모님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했던 것인지, 내 역량만큼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에 속상했던 것인지.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서 내 의지대로 해 보지 못해서 속상했던 것인지.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몰랐다. 아쉬움과 속상함은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채, 다들 이렇게 사는 걸 거라며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저 하루하루 수동적으로 살았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10개 중 9개가 맞지 않아도 단 1개가 맞다면 그 단 1개를 보고 맞춰가며 살아가기도 하니까 말이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고, 바람직해 보이며, 그럴듯한 것들에 나를 어떻게든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누구에게나 직장 생활은 다 힘들고, 자기 적성대로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며 맞지 않는 것들 보다 맞는 것을 찾으며 적응해 보려고 순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나랑 아예 맞지 않는 건 아닌 것도 같았다. 해맑은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순간만은 참 좋았거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닐까 늘 마음 속에서 의심이 올라오곤 했지만, 늘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던 나였기에 전공을 바꿔본다거나, 직업을 바꿔본다거나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실망할 것 같아서, 내 판단이 틀리면 어쩌나 자신이 없어서, 변화를 감당하기가 두려워서, 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두렵고 망설여지기만 했다.           

   

늘 주어진 대로 인생을 살던 나였지만, 늘 내 마음과 감정은 뒷전에 두고 표현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쌀알만큼의 용기를 냈던 적이 있다. 바로 석박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전공이나 직업을 바꿔볼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기숙사에서 일탈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전공을 바꾸지 않고 공부하는 거라면 부모님도 허락해 주실 것만 같았다.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며, 내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 딱 좋구나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 결정이  내 인생에 크나큰 후폭풍을 가져오게 될 줄은 그 땐 미처 알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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