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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쟁이 Jun 17. 2024

#4 그날의 기억.

과거를 통해 나는 나를 배운다


그날은 참 이상했다. 타이밍도 이상했고, 모든 것이 다 안되려고 이렇게 다 맞춰지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들이 이상하기만 했다.


박사 논문도 무사히 끝냈겠다 졸업도 일주일 남았겠다, (정말 논문 쓰는 동안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꿈속에서도 계속 논문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후련한 마음으로 가깝게 지내던 동네 친구와 커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동네 친구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눈앞에 번개 모양의 가는 선이 보이는 거다. 햇볕이 쨍쨍한 화창한 날이라서 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을 리도 없었다. 그 번개 모양의 선들은 점점 그 개수와 크기가 많아지더니.. 급기야 온 시야를 다 가렸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이지. 내 눈에 이상이 생겼구나. 그동안 너무 용을 썼나 보네.’

무섭고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집 앞에 있는 안과에 달려갔다. 평소에 검진을 해주시던 원장님이 아니시고, 다른 분이 계셨다. 그분은 검사해 봤자 망막이상이라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 하셨다. 집 가까운 종합 병원에 바로 전화했더니, 오늘은 진료가 끝났다며 예약을 못했으니, 다음날 아침 일찍 현장에서 접수해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아주아주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하나 떠오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엔 수십 개의 걱정을 낳곤 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옆에서 남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런다.      


“월차 냈으니, 내일 가보면 되잖아. 빨리 좀 자.”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쳐다보았다. 번개 모양은 다행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 이번엔 벽 쪽에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다행히 번개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졌는데 가지 말까 진료를 보지 말까 한참 망설이는데, 이미 월차를 낸 남편이 짜증이 살짝 섞인 목소리로 이미 월차도 냈는데 그냥 가보자고 했다.      


병원에 가서 한참 기다렸더니 내 이름을 부른다. 남편이 따라올 줄 알았는데, 따라 들어오지 않더라.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혼자 가라는 신호 같아서 혼자 들어갔다. 진료실에 잔잔한 클래식을 틀어놓으신 의사 선생님이 대뜸 양쪽 눈 다 망막이 많이 얇단다. 왼쪽은 그런 일도 있었으니, 이상이 있는 거 같다면서 망막 주변으로 레이저를 돌려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시술은 아주 간단해서 아주 금방 끝낼 수 있고, 일상생활도 바로 가능하다면서.  

    

 혹시 다른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옆에 누군가가 같이 없으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고, 왠지 모르게 말을 못 하겠더라고. 스스로 똑 부러지게 ‘아니요’라고 내 의견을 말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고, 왠지 모르게 상대방의 제안에 싫다고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만 같기도 하고, No라고 말하기가 어색해 반발심 없이 하라는 대로 해 버린 적이 많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혼자 있으면 나에게 선택권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미용실에 가서도 혼자 가면, 왠지 원장님의 말에 거절을 못해 회원권을 끊고 있었고, 옷을 사러 가서도 혼자 가면 매장에서 그냥 구경만 나오기가 뭣해서 매장 언니의 말을 듣고 어느새 결재하고 있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러서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지금은 그렇게까지 ‘바보’스럽진 않지만 말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을 1:1로 혼자서 듣고 있자니, 또 그 병이 도졌다.           

혼자 있으면 No 못하는 병. 판단력이 흐려지는 병.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네~’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혼자 있으니 또 선택권이 없는 것만 같았다.      


‘레이저라니. 피부과에서 시술받는 그 레이저 같은 건가?’     


진료실에 혼자 남겨져서 No라고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 동안에는 왜 가만있었지? 가만 생각해 보니 참 바보스럽기가 이를 대가 없다. 가만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걱정과 불안이 뒤엉켜서 판단을 제대로 못 내리고 있었던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일단 시술을 받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무서웠다.

피부과 레이저는 피부가 좋아지려고 하는 레이저니, 눈 레이저도 그런 건가 보다 하고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해 보지 않고 눈에 좋으려니 하고 그대로 믿긴 했다.

그대로 믿긴 했지만, 한다고 해도 하루라도 미뤄보고 싶었다. 바로 하기는 왠지 무섭고 겁이 났거든.      


그런데 남편이 걸렸다.      

그 전날 밤부터 짜증 냈던 남편이 제일 걸렸다. 나 때문에 월차를 낸 남편의 표정을 전날 밤부터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다. 진료를 보는 데도 따라 들어오지 않았고. 이 상황이 그저 번거롭고 성가신 듯 내내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제일 싫어라 했던 나였기에, 남편에게 오늘 받지 말고 다음번에 날 잡아서 다시 오자는 말을 꺼내려니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 너 때문에 월차를 썼는데, 내일 또 쓰라고?”라며 싫어할 것 같았거든.     


 생각은 많았지만, 남편이 싫어까 봐 더 알아보고 담 번으로 예약 잡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내 폰 배터리는 다 닳아서 전원이 꺼졌다. 엄마나 동생에게 전화하기도 망설여졌다. 남편 폰을 빌려서 하면 될 텐데 그날따라 내내 폰만 보고 있는 남편에게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유별나게 굴지 말고 그냥 시술받아’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내내 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남편에게 온전히 의지하거나 온전히 내 마음을 보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나는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투명하게 털어놓는 것을 겁내 했었고, 그때까지도 나는 남편과 완전한 가족이라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편보다 아직까지도 엄마 아빠가 내 가족이고, 남편이랑은 아직도 완전히 가족이라 하기에 어색했다. 남편은 몰랐겠지만, 적지 않은 거리감에 적지 않은 눈치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남편에게 무서우니 진료실에 같이 들어달라고도, 시술하기 무서운데 다음번으로 미루면 안 되겠냐고 바로 물어봤다면 좋았을 텐데 물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났는데, 이런 것까지 부모님이나 동생과 상의한다는 것 자체가 남편에게 너무 어른스럽지 못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따라 희한하게도 매번 친정 가족들에게 의지한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폰 배터리가 다 닳아서 꺼진 건 전화하지 말라는 신호인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늘었다. 남편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전문가가 하라고 했으니 하면 되겠지 뭘 또 생각을 하고, 뭘 또 걱정을 하나 싶었다.


 

왜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그런 치기를 부렸는지 모를 일이다. 망막 이상으로 이미 한차례 레이저 수술을 받은 엄마에게. 혹은 의사 동생에게 물어보는 것이 왜 의지하는 것이라고 왜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도대체 왜 그랬는 건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별 일 아니겠지 대수롭지 않게. 의사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겼다.   

  

오후 3시까지 나는 폰만 보는 남편 눈치를 보면서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ㅇㅇㅇ 환자 들어오세요.”


낮은 저음의 의사 선생님은 왼쪽 망막 주변으로 360도 레이저를 정확히 두 번을 돌렸다. 복기하며 글을 적어나가는 지금도 그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눈동자 표면이 뜯겨 나가는 듯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2번이나 레이저를 돌린다고. 망막 주변을 이런 식으로 레이저로 돌릴 거라고 제대로 설명도 안 해줬으면서...

“잠깐만요. 선생님 잠깐만요!”

한 번을 돌린 뒤, 그 고통을 못 참아내지 못할 것만 같고 너무 무서워서 의사 선생님께 다급하게 소리쳤다. 의사 선생님은 이러시면 안 된다면서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한 번 더 돌려야 한다고 다시 앉으라고 하셨다.   

  

‘이렇게 아픈데 한 번을 더 해야 한다고? 피부과 레이저 시술처럼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나?’

  갑자기 너무 무서웠다. 레이저 기계 한 대를 사이에 두고, 의사 선생님이 망막 주변을 레이저로 한 바퀴를 돌리고, 또 한 번 더 돌릴 때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공포가 그대로 다시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렇게 레이저를 두 번 돌리고 집에 왔다.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던 의사 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왼쪽 눈에 광시증이 생겨 사라지지 않는 거다. 눈을 감아도 번쩍번쩍. 눈을 떠도 번쩍번쩍. 레이저를 돌린 왼쪽 눈 옆에서 계속 번쩍거렸다. 하얗게 우주선처럼 생긴 형체들도 눈을 감기만 하면 빙빙 돌아다녔다.     

분명히 부작용이 없다고 했는데… 내 눈은 그날부터 매일매일 번쩍번쩍. 말썽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날마다 무서워서 울었다.

시술받고 바로 다음날 여행도 갈 수 있다고 하셨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받지 않는 건데...

엄마한테 여쭤볼걸... 동생한테 물어볼걸.. 남편이 싫어하든 말든 미루자고 할걸..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해 봤더니, 엄마가 그러신다.

엄마는 레이저 치료 이후로 상이 작게 보인다고. 눈에 레이저 시술하는 건 어마무시하게 무섭고 두려운 일인데 그런 걸 왜 물어보지도 않고 한 거냐고. 그런 걸 왜 쉽게 판단한 거냐며 나무라셨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가 없는데 말이다.

괴로워서 무서워서 절망스러워서 엉엉 우는 나를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남편이 달래주기 시작했다. 남편의 토닥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다.


“레이저 시술받은 왼쪽 눈 측면 쪽에서 계속 번쩍번쩍 거립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자꾸 하얀 물체가 왔다 갔다 떠다니는데, 언제쯤 없어지나요? ”하고.

    

망막이 찢어진 것이 아닌데. 아무 이상도 없는 건데..

왜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레이저를 한 거냐고 따지고도 싶었지만,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 이상이 없고. 그럴 리도 없단다. 광시증이나 다른 부작용이 생길 리가 없단다.

있다 한들 조금만 있으면 다 사라질 거라며.

전화를 받은 간호사 분은 대기 환자들이 많아 바빠서 전화받기 힘들다며 짜증 섞인 듯 말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내가 갑자기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내 눈이 이렇게 이상해진 거구나.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긴 거지?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번쩍번쩍… 광시증이 사라지지 않는데,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집 근처 안과에 가 보아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광시증이 아직 남아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론적으로 그럴 리가 없단다. 망막이 찢어지지 말라고 예방용으로 하는 시술이니 아무 이상 없을 거란다. 신경 쓰지 말고 일상을 지내란다.

이론적으로 그럴 리 없는 현상들이 내 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왜 그럴 리 없다고만 하시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레이저 이후. 왼쪽 눈은 너무 예민해져서. 조금만 무리해도 빨갛게 충혈되고. 간지러우며. 눈이 시리다. 여전히 눈을 감았다 뜨면 번쩍번쩍 광시증이 나타난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환한 곳으로 오거나, 환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가면 그 증상은 더 심해졌다.    

 

1년쯤 지났을까? 여전히 광시증이 심해서 망막으로 유명한 대학병원에 가보았다. 양쪽 망막 모두 이상이 없어서 어떤 시술도 필요가 없었다 하셨다. 과잉 진료였던 거지. 망막이 찢어졌을 때 이어 붙이는 수술은 해도 망막이 얇다고 망막 주변을 360도 돌리는 시술은 별 효과도 없어서 잘하지도 않는단다.     

‘2번씩이나 돌리다니… 많이도 돌렸다.’ 하시는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괜찮아졌을 때 그 병원에 가지만 않았더라도.

남편이 짜증을 내지만 않았더라도..

전화기만 꺼지지 않았더라도..

엄마한테 전화만 해 봤었더라도..

남편의 반응이 어땠든지 간에, 미루자고 말만 했었더라도...

원망에 원망을 거듭하다 미움에 미움을 거듭하다 결국엔 내 탓을 했다.


결국 내 탓이지 뭐. 결국엔 다 내 탓이지 뭐.

다 내 탓. 한없이 내가 밉기만 했다.      

과거를 되돌릴 수도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데

그때의 나는 그렇게 과거에 매몰되어 있기만 했다.     


그런데, 나쁜 일은 항상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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