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로 다시 개발된 조선 시흥의 중심지
드디어 시흥의 열두 딸들도 마지막 주인공을 맞이한다. 마땅히 시흥의 맏딸이어야 할 막내딸이다. 바로 시흥의 옛 이름, 금천의 이름으로 태어난 금천구다.
옛 시흥군의 중심은 바로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이었다. 그곳에 시흥군 관아도, 시흥향교도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호암산 자락의 호압사(호암사 아님!)도 있었고, 1901년 지어진 가리봉공소도 있었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4년 2월 7일에 처음 예배를 시작한 시흥교회도 있다. 이 중 시흥교회는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모여든 영등포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된 이후에도 시흥군청은 영등포에 있다가 안양으로 옮겨갔고, 1963년에는 마침내 시흥동을 포함한 시흥군 동면 일대가 통째로 서울에 편입되면서 시흥군은 시흥 없는 시흥이 되었고, 시흥동은 서울의 일개 변두리 동네가 되었다.
시흥군 동면은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신림동, 봉천동이 되었는데, 이 중 신림동과 봉천동은 1973년 관악구로 일찌감치 분리된다. 남은 가리봉동의 대부분인 현 가산동과 독산동, 시흥동이 지금의 금천구를 이룬다. 가산동, 독산동, 시흥동은 동의 역사에서도 각자 특징이 있는데, 군부대와 우시장의 독산동, 주택단지로 개발된 시흥동, 구로공단의 가산동이다.
시흥동은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당시에는 평범한 농촌에 불과했다. 서울시에서 시흥동을 개발한 계기가 되는 사건은 3년 후인 196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해 7월, 장마로 한강이 범람하면서 4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8월 서울시는 시흥동과 상계동 지역에 수재민 정착지를 조성하였다. 시흥동에서는 산91번의 대지 6만 평에 천막을 치고 화장실과 우물, 도로를 설치했다. 수해지구로 돌아가는 가구에는 구호양곡을 지급하지 않고 정착지에 남는 주민에게만 지급해 시흥동을 기존 상습 수해지역을 대신하는 주거지역으로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한편 정부에서 서울시의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국공유지를 불하해 주택을 짓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때 서울시가 정부에 건의한 국유지와 주택 계획을 보면 하월곡동이 1,915동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바로 시흥동 산100의 임야 8만 580평, 1,095동이었다.
시흥동 산지의 거주 구역에는 도시 기반시설이 부족해 많은 불편을 겪었다. 서울시는 군의 지원을 받아 시흥동과 같은 변두리 고지대에 30만 개의 연탄을 공급하기도 했다. 갑자기 수해민이 한 곳에 모이면서 장티푸스가 대거 발생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인구가 급증해, 1967년에는 주민이 2만 명까지 증가했다. 돌산에 만든 거주지인지라 처음에 만든 우물 73개로도 물을 다 감당할 수 없자, 서울시는 난민촌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을 막아 공동수도로 쓰는 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수재민들이 주축이 된 시흥동의 난민촌 주택은 1967년 2월 21·22일 큰비를 맞아 또 수재를 겪었다. 집도 허술했고 하수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큰비가 내리자 약해진 지반이 무너지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수재민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1967년 5월 19일부터 11월 27일까지 가내수공업센터를 세웠고, 8월 초에는 시흥동과 같은 고지대 연탄공급불량지구를 위해 연탄공판장을 세워 시의 연탄 생산량 30%에 해당하는 90만 개씩을 공급·판매했다.
시흥동에 수도가 제대로 공급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가뭄이 들 때마다 시흥동 고지대는 식수난에 시달렸고, 기존에 뚫은 우물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1968년 우물 개발, 1970년 9월 식수용 지하수 개발 등을 시도했으나 예산 문제와 수혜자 부담금 문제 때문에 제대로 시작도 못하는 곳이 많았다. 1972년 5월 급수 확장 작업, 1973년 6월 12일 수원지 확장공사, 1975년 당산-시흥 송배수관 부설공사 착공, 1981년 시흥동 가압장 공사 준공, 1982년 시흥동 배수지 설치, 사당-시흥 송배수관 부설공사 준공 등 시흥시의 급수난을 해소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공력이 필요했다. 또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1973년 시흥천 준설 작업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여러 차례 개발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시외버스와 시내버스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시흥동의 땅값은 가파르게 올랐다. 서울 편입 전에는 평당 50원에도 팔리지 않던 시흥 버스정류소 일대 땅이 약 5년 동안에 2만 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1977년 7월 25일 남부순환로 개통, 1984년 시흥동-불광동을 잇는 서부간선도로 건설 확정, 한참 후의 일이지만 2016년 7월 3일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개통 등 도로가 갖추어지면서 시흥동은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자리잡고 있다. 1977년 8월 2일에는 서울시에서 시흥동에 7,470평 주택단지 조성을 허가하면서 시흥동 지역에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났다. 1980년을 거치면서 시흥동은 급속히 개발되어, 1975년에는 79,200명이었던 인구가 1990년에는 161,110명으로 2배 넘게 증가했다. 이 1990년 인구가 시흥동의 최고치로 이후로는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1966년 장티푸스 사건 때 환자들을 중부시립병원으로 옮긴 기억이 있는 시흥동에는, 1968년 공원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을 지을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시흥동에는 아직도 종합병원이 없다. 금천구가 세워지고도 23년이 지나고서, 2018년 12월 부영주택에서 종합병원원이 포함된 개발계획서를 제출하면서 시흥동 종합병원 계획은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22년 2월 건축허가를 받고 4월 기공식까지 연 종합병원 건설은 멸종위기종 맹꽁이 서식지 이전, 부지 불소 기준수치 이상 등의 악재를 만나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착공이 지연되고 있는 중이다.
독산동에는 일제강점기부터 군부대가 주둔했는데, 그때에는 신병훈련소가 있었고, 6·25전쟁 때에는 미군 보급기지로 쓰이면서 전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다가 한국군이 그 자리를 계속 쓰면서 독산동의 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독산동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던 것은 1970년대부터 2002년까지 존재한 우시장 때문이었다.
1971년 4월 21일, 독산동에 중앙도매시장 조수육부 영등포분장이 문을 열었다. 인성식품상사가 서울시를 대행해 시장을 운영했으나 1년 3개월만인 1971년에 운영을 중단했고, 1974년 4월 25일 협진식품주식회사가 관리를 대행하는 형식으로 농수산물도매시장 축산부 분장이 다시 독산동에 개장했다.
이는 1973년 2월 6일 개정된 농수산물도매시장법에 따른 것으로, 기존에는 서울시내의 정육업자가 산지에서 소를 도축, 판매해 오던 것을 중단하고 대신 독산동의 협진식품, 마장동의 성풍산업에서만 경쟁입찰을 통해 육류를 공급받게 했다. 독산동 우시장에 들어선 식당에서 처음 개발된 메뉴로 등심, 안심, 제비추리, 차돌박이, 아롱사태, 갈비, 육회, 머리골, 등골, 콩팥, 생간, 천엽, 염통 등 20가지가 한꺼번에 나오는 ‘암소한마리’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1986년 가락동에 새 도축장이 들어설 때까지, 마장동 우시장과 함께 서울시의 단 둘밖에 없는 도축장으로서 독산동 우시장은 198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4년 5월 말 협진식품이 부도를 내고, 센터 건설사인 토왕건설이 협진식품을 인수하여 세운 유창식품이 민간 도매법인으로 재지정받지 못한 데다 토왕건설까지 부도가 나면서 독산동 축산물 도매시장은 영업이 중단되고 말았으며, 2002년에 공식적으로 도축장이 폐쇄되어 안양시 박달동으로 이전했다. 마장동 도축장에 비하면 4년을 더 버틴 셈이지만 우시장 자체는 마장동에 비해 쇠퇴한 편인데, 그나마 2017년 금천구 도시재생과 장차 개통될 신안산선 신독산역에 희망을 거는 모양새다.
우시장과 함께 독산동의 랜드마크로 기능하던 곳이 1968년 5월 24일 완공된 독산동 코카콜라 공장이다. 그러나 코카콜라 본사에서 한국에서 코카콜라 완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한국코카-코카보틀링㈜를 세워 4개 회사로 나뉘어 있던 한국 코카콜라 생산체계를 일원화하면서 독산공장의 기능도 1999년 전부 여주공장에 통합되었다. 그 외에도 독산동에는 롯데알미늄, 동아출판사가 있으나 롯데알미늄은 신대방동으로, 동아출판사는 안산시 반월공단으로 이전했다.
한편 독산동 역시 1970년대 후반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 1974년-1978년 간에 아파트단지가 무려 6곳이나 조성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아파트 건설이 주춤하였고, 이후 1990년대 한국에서 아파트가 전국적으로 널리 퍼질 때 독산동에도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되었다. 독산동의 인구는 1975년 27,200명에서 1990년에는 131,60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으나 이후 시흥동처럼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가산동은 1966년까지만 해도 모아래와 택하라는 자연마을에 가옥이 약간 있을 뿐 대부분이 논이었는데, 이는 북쪽과 남쪽에 밀집 가옥으로 나타나는 구로동과 독산동과도 비교되는 한적한 농토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산동은 지금도 금천구의 세 동 중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이지만, 그 이유는 공업이 가장 발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농지가 바로 제1차 산업의 거점인 것을 감안하면 역사가 격변하고 돌고 돌았지만 금천구 내의 산업지구라는 점에서는 달라진 게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가산동이 공업단지, 지금은 지식산업단지로 탈바꿈한 계기는 바로 인근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다. 구로동의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성공리에 자리잡으면서 공업단지를 2차례에 걸쳐 확장했는데, 그때마다 여러 후보 지역들이 올라왔으나 결국 선택된 곳은 두 번 다 구로동과 인접한 가리봉동(지금의 구로구 가리봉동과 금천구 가산동)이었다. 구로동의 제1단지와 가까워 이중투자를 피할 수 있고 단지조성기간을 단축할 수 있으며 1단지 입주기업체와 계열화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혔다. 제2단지는 1967년, 제3단지는 1969년 조성되었고, 1974년에는 공단 부지 조성이 완료되었다. 3단지 조성 중 원주민 이경순 씨가 끝까지 토지를 팔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수용법에 의한 수용령을 발동해 강제로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수출산업공단이 구로제1, 2, 3단지, 인천 부평·주안 4, 5, 6단지를 조성하면서 유일하게 수용령을 쓴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일명 구로공단은 1971년 한국 전체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돌파할 때 혼자서 1억 달러를 차지했고, 1977년 100억 달러 수출 돌파 때에도 11억 달러를 도맡는 등 수출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했다. 1970년대부터는 그 전의 경공업 대신 정부 정책에 맞추어 중화학공업 제품을 주력으로 전환하면서 여전히 국가 수출의 10%를 꾸준히 점유하고 있었다. 구로공단은 한국의 성장의 상징인 동시에 성장이 주춤하면 바로 타격을 입는 곳이기도 해, 오일쇼크와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의 여파를 모조리 얻어맞아 1970년대 말 11만 명에 달한 공단 노동자 수가 1982년에는 5만 8천여 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1986년 3저 호황을 맞아 공단은 다시 회복세를 맞이해 고용 규모도 7만 명으로 약간 상승했다.
구로공단 일대와 그 배후지인 가산동의 주거지의 삶은 장밋빛은 아니었다. 우선 안양천변에 지어져 수해에 취약했는데, 1972년, 1977년, 1987년 집중호우를 맞이해 이때마다 수많은 기업체가 침수되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은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에서 비롯했다.
한국수출산업공단은 늘어나는 노동자 수에 맞추어 공단 기숙사를 건립했고 입주 기업체들에게도 기숙사를 만들도록 독려했으나, 기숙사 수용률은 가장 높을 때에도 1984년 37%에 불과했고 가장 낮은 1978년에는 19%에 불과했다. 이를 틈타 가산동에 빼곡히 들어선 노동자 밀집 거주지가 바로 ‘벌집’이었다.
‘벌집’은 방 하나, 부엌 하나, 공동화장실 사용으로 대표되며, 수많은 작은 방들이 모여 있어 ‘벌통집’, ‘닭장집’, ‘토끼장’, ‘비둘기장’이라고도 했다. 동아일보 1984년 8월 1일 기사에서는 벌통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가리봉동 일대에는 『벌통집』 형태의 세방을 놓는 집이 5백여 채나 있으며 한집에서 52개의 방을 세놓는 경우도 있다. 벌통집은 보통 1평반에서 2평짜리 방 하나에 부엌이 달려 있는데 부엌 없이 복도나 마당에서 밥을 짓는 곳도 많다. 대부분 한옥을 세놓기 좋게 개조한 집들이다. 공단근로자들은 방세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방에 보통 3명, 심지어는 2평 미만의 방에서 6명까지 합숙하고 있다. 어떤 때는 5, 6명이 2평짜리 좁은 방에서 모로누워 칼잠을 잔다.
1982년 구로구청의 자체 조사에서는 당시 가리봉동에 전체 벌집의 64%에 달하는 1,770개 동이 있었다고 하며, 수요가 너무나 많아 가리봉동 땅값이 이미 서울의 1급 주택지로 개발된 강남 지역과 맞먹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한 달 방세가 입사 3년차 숙련공이 48시간 잔업을 하고 2일 철야를 해도 겨우 맞출 수 있는 수준이라 여러 명이 같이 방을 쓰는데 위 기사에서처럼 5, 6명이 사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생활 환경도 열악한데 월급은 적고 노동 환경은 8-10간은 기본에 4-5시간 연장근로, 철야, 특근까지 강제였다. 심지어 하루 종일 컨베이어벨트에 매달려 있다 보니 화장실에 못 가 방광염에 걸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생활에 못 이기다 마침내 폭발한 것이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다.
구로공단은 본디 서울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에 세워졌으나, 1990년이 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해 구로공단 지역에 재개발 압력이 심해졌다. 더구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더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임금으로 겨우 유지되던 구로공단의 노동집약적 산업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제 한국은 더는 저임금으로 먹고 사는 경공업에 의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로공단은 금천구 독립 이전인 1990년대부터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구로공단은 이에 제조업종만 가능한 입주 조건을 완화해 IT관련 업종이 입주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고, 정부도 재래식 업종에서 첨단 업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2000년 12월에는 구로공단의 이름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해 지식산업, 정보통신산업 업종을 주요 입주 대상으로 바꾸었다. 더욱이 IT붐 직후 몰아닥친 닷컴버블 붕괴는 관련 기업들이 지가가 낮은 편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전할 수 있는 유인이 되었다. 그렇게 가산동은 구로구에서 금천구로 독립한 이후, 제조공업단지에서 첨단산업의 첨병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가리봉역이 2005년 7월 1일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구 시흥군 동면의 가리봉·시흥·독산 3동은 구로구에 속한 채 현대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구로구는 이와 같은 발전으로 말미암아 1990년대에 들어서면 인구가 70만을 돌파해 시정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비슷하게 인구가 많은 성동구와 도봉구에서도 분구가 논의되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구로구가 처음으로 1992년 10월 22일 구로구의회에서 분구를 50명 만장일치로 건의하기에 이른다. 1993년 1월 9일에는 서울시에서 이 세 구의 분구를 시의회에 상정하기로 발표했는데, 3월 31일에 정부 조직을 동결하기로 한 방침과 맞지 않는다 해 백지화했다.
그러나 이 세 자치구는 지나치게 비대하므로 결국은 분구를 맞이하게 된다. 1994년 서울시 구로구분구(안) 문건에서는 당시 구로구의 국회의원 선거구인 구로구 갑·을·병에 맞추되 을과 병에 나뉜 독산1동을 을구로 편입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안에서는 1994년 6월 30일 당시의 구로구 인구 710,948명이 향후 5년 이내에는 1,013,708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 역사에서 구로구와 금천구 인구가 이 정도로 폭증하지는 않은 것을 감안하면 3구 분할이 현실화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안이 통과되었다고 해도 구로구 갑이 구 부평군 수탄면(항동은 부평군 옥산면) 지역이니 시흥의 딸은 여전히 열둘이다. 부평의 딸이 하나 늘어날 뿐.
이 안은 조용히 사라졌고, 실제로 논의된 것은 구로구를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성동구와 도봉구도 마찬가지로 둘로 나누기로 했는데, 쉽게 논의가 끝난 성동구와 도봉구와는 달리 구로구의 분구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게 되니 더 살펴보자. 8월 신문 보도에서는 성동·도봉·구로구를 모두 구를 지나는 주요 하천에 따라 분할하는 안을 제시하는데, 이에 따르면 구로구는 안양천을 따라 나눠진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구로구에 두 가지 다른 안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경부선을 따라 나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부순환로를 따라 나누는 것이다.
안양천 경계 분할안은 생활권에 따른 것이긴 하나 안양천 서편의 인구가 안양천 동편의 절반도 되지 않아 면적도 인구도 맞지 않는다. 경부선 경계 분할은 면적 위주의 분할이고, 남부순환로 경계 분할은 인구 위주의 분할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경계 분할안을 철저하게 경부선을 따라 분할해 구 경계가 길쭉하게 남북으로 구로구를 관통하는 것으로 여겼는데, 1994년 11월 1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보도에서는 위 그림과 같이 경부선을 따라가다 경부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는 남부순환로를 따라 구 경계가 서진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편이 훨씬 더 구 경계가 짧고 자연스럽다.)
다른 구 분할안과는 달리 구로구 분구는 이렇게 정부에서 2개의 안을 제시했기에 더 결정에 오래 걸렸는데, 김주호 구로구의회 부의장을 필두로 구의회 의원 절반 정도가 제3의 안을 제시하면서 더 심한 파열음을 내게 된다. 그 안은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하되 남부순환로가 지나가는 가리봉동은 나누지 않고 모두 신설구에 포함하는 것으로, 특히 가리봉동 주민들이 이 안을 지지했다. 이 수정안 주장에서는 이렇게 해야 구로구와 신설구의 인구가 37만 5천명 대 33만 3천 명으로 균형이 잡히고, 원래의 2안은 40만 4천명 대 30만 4천명으로 여전히 차이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박승식 구로구의회 의장은 이 안을 반대했다.
서로 불신임안까지 나올 정도로 심한 갈등을 빚던 구로구의회는 결국 11월 25일 경부선 경계안과 남부순환로 경계안을 표결에 붙여 32대 17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분할하기로 결정하고, 신 구의 이름은 시흥군의 옛 이름인 금천에서 따서 금천구로 정했다.
1995년 3월 1일, 서울의 마지막 자치구이자 시흥의 막내딸 금천구가 이렇게 태어났다.
1936년 영등포출장소 설치를 시작으로 수많은 시와 자치구가 분리 독립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 1914년 시흥군은 열두 명의 딸 도시들로 현대 한국에 그 흔적을 남겼다.
서울특별시 관악·구로·금천·동작·서초·영등포구 6개 구와 경기도 과천·광명·군포·시흥·안산·안양 6개 시, 총 12개 지자체는, 한때는, 시흥군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이진한·임성수·이대화·이정은·계봉오, 서울 동의 역사 금천구, 서울역사편찬원,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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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환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산디지털단지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구로구 分区(분구)건의 조선일보 | 1992.10.23 기사(뉴스)
서울시 올해 3개구 신설 한겨레 | 1993.01.10 기사(뉴스)
도봉-성동-구로등 3개区(구) 分区(분구)계획 백지화 조선일보 | 1993.04.01 기사(뉴스)
성동-도봉 分區案(분구안) 확정 광진구(성동동부) 강북구(도봉남부) 탄생 조선일보 | 1994.11.19 기사(뉴스)
구로구 분구 초안 (데이터 주의) – 아카라이브 글이지만 서울특별시 문건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로구 분할 새수정案(안) 조선일보 | 1994.11.10 기사(뉴스)
서울 2개區(구) 分區名(분구명) 확정 경향신문 | 1994.11.17 기사(뉴스)
구로구 分區(분구)확정 금천區(구)·구로區(구)로 경향신문 | 1994.11.26 기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