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게 아낌없이 주는 시흥군
지금까지 1914년의 시흥군에서 서울시의 여섯 자치구, 경기도의 여섯 시, 합해서 열두 지자체가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시흥군은 구한말부터 경인선과 경부선이 모두 통과했고, 자동차 교통이 발달하는 대한민국 산업화 시기에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모두 시흥군 일대를 지나도록 만들어져 교통이 매우 편리했다. 그 때문에 근대화와 산업화의 수혜를 직통으로 받아 열두 지자체가 나올 정도로 번성한 지역이 되었다. 1914년의 시흥군에 속한 지역의 인구를 합하면 2024년 4월 기준으로 서울시 쪽에 약 201만, 경기도 쪽에 약 183만, 합해서 약 384만 명이 살고 있다. 이는 현재 가장 인구가 많은 광역시인 부산의 약 328만보다도 많은 것이다. 시흥군이 그대로 광역시가 된다면 시흥의 딸은 아마 열세 자치구가 되었을 것이다. 안산시 상록구의 중심지를 차지하는 반월면이 빠지니 안산시의 두 구가 그대로 남지는 못하겠지만 안양시의 두 구가 그대로 자치구가 될 것이므로. 구청은 원래 시흥군처럼 영등포구에 두기에는 너무 서북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역사성을 감안해 지금의 금천구청 근처에 두지 않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너무 일찍 개발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도시로 성장하지 못하고 무려 열두 딸로 나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인근의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인천은 서울의 외항으로서 구심점이 되어 발전하며 주변의 경기도 지역들을 흡수했지만, 시흥은 어디까지나 서울과 인천의 발전 덕분에 2차로 발전한 곳으로서 나라에서 시흥을 구심점으로 개발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경부선과 경인선, 겅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시흥은 언제든지 이유가 생기면 서울을 위해 뜯어가기 좋은 지역으로서 주목받았을 뿐이다.
일제가 서울과 인천을 통합할 계획이 있었기에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목인 영등포를 시흥에서 서울로 뜯어갔다.
6·25 전쟁 이후 서울의 확장 방향이 한강 남쪽으로 정해지면서 훗날의 구로, 금천, 동작, 관악, 서초 일대를 시흥에서 서울로 뜯어갔다.
서울 구도심의 공업지역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구로를 새 공업지대로 지정했고, 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가 필요해 금천을 독립시키고 광명을 시흥에서 서울로 뜯어가고자 했다. 정책이 바뀌면서 서울로 뜯어가는 대신 독립시켰을 뿐.
6·25 전쟁 때 한강철교를 폭파시킨 아픈 기억 때문에 한남대교를 놓았고, 한남대교가 놓인 김에 시흥에서 뜯어간 서초에 경부고속도로를 깔면서 서초가 독립하고 강남이 발전했다.
6·25 전쟁으로 정부기관이 안전하게 피신할 곳을 찾으면서 과천을 시흥에서 뜯어가 독립시켰다.
구로의 공업단지도 비대해지자 또 시흥의 안산 일대를 반월공단으로 뜯어가 독립시켰다.
그럼에도 서울에 사람이 계속 몰려드니 시흥의 군포 일대에 산본신도시를 만들어 독립시켰다.
그렇게 서울을 확장할 일이 있으면 시흥을 뜯어갔고, 서울에 사람이 몰리면 시흥을 뜯어갔고, 서울이 위험하면 또 시흥을 뜯어갔다. 시흥은 언제나 서울에 아낌없이 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렇게 줄 때마다 딸들이 하나씩 태어났다.
영등포(1936년)
안양(1973년)
관악(1973년)
구로(1980년)
동작(1980년)
광명(1981년)
안산(1983년)
과천(1983년)
서초(1988년)
군포(1989년)
시흥(1989년)
금천(1995년)
당시 한국은 읍·면 단위로 개발해 시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시흥은 열두 딸들로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군 전체를 개발하되 도시화되지 않은 지역을 남겨놓아 도농복합시를 만드는 현재와는 달리, 당시에는 아직 일본의 행정에 영향을 받아 시와 읍과 면을 동격의 기초자치단체로 보고 있었다. 그런 정부 당국이 보기에는 시흥군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읍과 면을 묶어놓은 것에 불과했고, 따라서 필요할 때마다 시흥군의 읍과 면을 해체해 개발하는 데에 별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로공단이 구로구를 넘어 광명시까지 개발되게 했고, 안양시가 군포시와 의왕시까지 개발하는 등 한국의 도시는 읍·면 단위로 국한하기에는 너무나 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결국 읍·면 단위로 산산조각난 시흥군과 비슷한 운명을 걸은 광주군, 양주군과는 달리, 용인시, 고양시, 남양주시, 화성시 등 개발이 뒤늦은 군에서 출발한 시들은 도농복합시라는 이름으로 분할을 피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시흥·과천·안산이 합쳐져 시흥군이 된 지 이미 10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시흥의 열두 딸들에 이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통근 데이터를 이용한 수도권 행정동의 생활권 분포 분석은 다음 그림과 같다.
KCB통근데이터를 활용한 수도권 행정동 커뮤니티 분석. 정다빈·이재현, 대한교통학회 90회 학술발표회에서.
서초구·동작구·관악구는 3구역에 속하고, 안양시·군포시·의왕시·과천시는 21구역에 속하는데 동작구와 관악구 서부와 의왕시를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옛 과천군에 속한다.
영등포구는 1번 구역에 속해 나머지 옛 시흥군과는 달리 서울의 중심부와 같이한다.
구로구·금천구·광명시는 10번 구역에 속하는데 조선시대 시흥군의 핵심 지역이다.
안산시는 17번 구역에 속하고, 시흥시는 17번 구역과 25번 구역으로 쪼개지는데 17번 구역은 조선시대 안산군 일대다.
생활권으로 보면 서울의 발전으로 영등포구가 구 한성부 일대에 포섭되었고, 강남 일대가 개발되어 나머지 시흥군과 과천군에서 떨어져나왔으나, 나머지 시흥군 지역은 조선 시대의 시흥-과천-안산에 따라 생활권이 분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이유는 군내에 관악산과 수리산이라는 큰 산이 있어서, 관악산이 시흥과 과천을 나누고, 수리산이 시흥·과천과 안산을 나누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로는 서울 주도의 발전계획에서 옛 세 군이 하나로 합하는 지역인 안양을 일찌감치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둘째 이유와 비슷한데, 서울 주도의 발전계획에서 옛 세 군이 하나로 합하는 지역이 아니라 관악산과 수리산으로 멀찍이 나누어진 지역들을 위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옛 시흥군에선 관악산 너머의 영등포와 구로를 개발했고, 옛 과천군에선 관악산과 청계산 자락의 과천을 개발했고, 옛 안산군에선 수리산 너머의 수암·군자면 해안을 개발했다.
일부러 시흥군을 옛 시흥, 과천, 안산으로 따로 분리시킨 것은 아니지만, 시흥군 땅을 필요에 따라 뜯어가서 개발했기 때문에 열두 딸들이 태어났고, 그 딸들 중 옛 군들의 경계를 아우를 딸, 다시 말해서 서로 따로따로 사는 딸들 사이를 이어줄 딸들이 없었기 때문에 열두 딸들은 이렇게 다섯 모임으로 헤쳐모여 살고 있다. 일제시대 시흥군과 광주군의 한강 남쪽 강변을 아우르는 제3권역에서 서초구가 강남구와 동작·관악구 사이를 이어주는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한때는 하나였던 시흥의 열두 딸들.
서울을 위해 열둘로 갈라진 시흥군.
1995년 이후 지방자치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딸들이 태어날 일들은 없기에, 이 열두 딸들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대한민국의 수도권 서남부의 역사를 써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