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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Jun 14. 2024

왕비, 배달, 비만의 공통점은?

병부 절(卩)에서 파생된 '비' 계통의 한자들

지난 글, 半(반 반)에서 파생된 글자들의 마무리를 맡은 글자는 胖(살찔 반)이었다. 중국어로 비만을 비반(肥胖)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비(肥)의 자원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고기 육(肉)이 뜻을 나타내고 꼬리 파(巴)가 뜻을 나타내는 형성자 같으나, 肥의 옛 모양을 보면 이는 착각임을 알 수 있다.

왼쪽부터 비(肥)의 금문, 소전. 출처: 小學堂

肥의 오른쪽 부분이 巴가 아니다. 이건 병부 절(卩)이다. 그러므로 肥는 肉과 卩이 합한 글자다. 卩은 병부라는 뜻도 있지만 꿇어 엎드린 사람을 그린 글자기도 하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꿇어 엎드린 사람의 허벅지를 가리키는 데에서 肥가 살찌다는 뜻이 나왔다고 해석했다. 이대로라면 肥는 형성자가 아니라 회의자다.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肥가 들어가는 요렇게 생긴 한자가 있다.

위에는 肥, 아래에는 女(여자 녀)가 들어가 있는 이 한자는 妃(왕비 비)의 다른 형태다. 자기 기(己) 대신 肥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이 부분이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혹시 妃에서 己도 肥처럼 卩이 잘못 쓰인 것이 아닐까?

이에는 두 가지 대립하는 의견이 있다. 이는 妃의 갑골문으로 보는 글자에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기 때문이다.

왕비 비의 갑골문 1. 출처: 甲骨文硏究网
왕비 비의 갑골문 2. 출처: 漢語多功能字庫

갑골문 1은 子(아들 자)+女로 볼 수도 있고 巳(뱀 사)+女로 볼 수도 있는데, 子+女면 好(좋을 호)고 巳+女가 妃에 해당한다. 巳는 뱀 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태아의 형태다.

갑골문 2는 女+卩로, 肥(살찔 비)의 옛 형태와 같이 卩이 들어간다. 이 의견대로라면 卩이 肥와 妃에서 비슷한 구성 요소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의견에 힘을 더 실을 수 있는 이유는 妃와 음과 뜻이 비슷한 配(나눌/짝 배)가 있기 때문이다. 配의 갑골문과 금문은 아래와 같다.

왼쪽부터 나눌 배(配)의 갑골문과 금문. 출처: 小學堂

配의 갑골문은 술항아리를 뜻하는 酉(닭 유)+卩의 형태이나, 금문에서 卩이 己로 와전되어 지금의 자형이 되었다. 따라서 妃 역시 女+卩이었다가 지금의 女+己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妃, 肥, 配의 옛 형태를 검토해 본 결과 세 글자 모두 예전에는 女+卩, 肉+卩, 酉+卩로 썼었다. 그리고 음도 비, 비, 배로 비슷하며, 이 세 글자의 상고음도 마찬가지로 비슷하다. 卩의 한자 음이 옛날에는 사실 비나 배였던 것은 아닐까?

《시경·동문지선》에서는 밤 률(栗)·집 실(室)·곧 즉(卽)을 같은 라임으로 썼고 곧 즉은 병부 절(卩)이 소리인 한자다. 그러므로 卩의 소리는 률·실과 같이 지금의 -ㄹ 받침, 고중세 중국어로는 -ㄷ 받침에 해당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자 중에는 가끔 한 형태가 두 개의 다른 음을 가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卩의 음이 절이라고 비나 배가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卩에 다른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配나 肥 등에 들어가는 卩은 妃의 간략형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는 포지도(布之道)의 《광운형성고》(廣韻形聲考)에서는 옛 卩에는 PƏI라는 독음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配、妃为什么是「己」声?'라는 블로그 글에서는 卩이 服(복종할 복)의 일부분으로서 服에서 소리를 가져와 배, 비 등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중국의 문자학자 추 시구이는 妃는 무릎 꿇은 남자(卩)와 여자(女)가 같이 앉아 짝을 나타내는 것이고 여기에서 왕비라는 뜻이 파생되었다고 해석했다.

아직까지는 수수께끼 같은 점이 있기는 하나, 妃, 肥, 配 그리고 圮(무너질 비) 네 글자는 卩가 와전된 글자(己, 巴)를 공유하고 소리가 비·배로 비슷하기 때문에 卩이 '비'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配는 술항아리에서 사람이 술을 '나눈다'라 할 수 있고, 肥는 살이 서로 짝지어 붙어 '살찌다'라고 해볼 수도 있겠다.

이제 卩에서 파생되며 '비'나 '배' 음을 공유하는 한자들을 정리해 보자.  

    圮(무너질 비) - 퇴비(頹圮) 등, 어문회 특급  

    妃(왕비 비) - 비빈(妃嬪), 왕비(王妃) 등, 어문회 준3급  

    肥(살찔 비) - 비만(肥滿), 퇴비(堆肥) 등, 어문회 준3급  

    配(나눌/짝 배) - 배달(配達), 교배(交配) 등, 어문회 준4급  

그리고 肥에서 파생된 글자도 있다. 급수 외 한자지만 국어사전에 당당히 올라가 있다.  

淝(물이름 비): 동비하(東淝河 - 옛 이름 비수), 비수 싸움(淝水-) - 급수 외

卩(병부 절/비?)에서 파생된 한자들.

    妃(왕비 비)·肥(살찔 비)·配(나눌/짝 배)·圮(무너질 비)에 들어가는 己나 巴는 실은卩(병부 절)이었다.

    따라서 卩에는 '비'나 '배' 음이 있었거나, 그런 한자의 생략형으로 쓰였을 수 있다.  

    卩에서 圮(무너질 비)·妃(왕비 비)·肥(살찔 비)·配(나눌/짝 배)가, 肥에서 淝(물이름 비)가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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