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규 Sep 27. 2024

불길 훈(熏)에서 파생된 한자들

훈훈하다, 질나팔, 훈제 등

가릴 간(柬), 불길 훈(熏), 묶을 속(束), 동녘 동(東), 전대 탁(橐) 이상 다섯 글자는 모두 묶은 자루를 본떴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柬과 熏은 자루 안에 향풀을 넣은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熏의 여러 가지 금문과 소전(맨 오른쪽). 출처: 小學堂

《설문해자》에서 나오는 熏의 소전은 마치 싹날 철(屮)과 검을 흑(黑)이 합한 모습이라, “불 연기가 위로 나가는 것이다. 싹날 철(屮)과 검을 흑(黑)의 뜻을 따른다. 철흑(屮黑)은 그을음이다.”라고 풀이했다. 《광운》에서는 “불 기운이 성한 모습이다.”라고 풀이했다. 어문회 급수 시험에서는 이 한자의 훈음을 '불길 훈'이라고 하니, 《설문해자》와 《광운》의 풀이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금문의 熏은 이런 분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왼쪽의 네 가지 熏의 금문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것은 束 안에 점이나 선이 들어가 있는 형태로, 이는 柬과 유사하다. 가장 왼쪽의 금문은 東 안에 점이 네 개 찍혀 있다. 그 오른쪽의 금문은 柬 밑에 흙 토(土)를 받쳐 썼고, 그 다음으로는 東 밑에 불 화(火)를 받쳐 썼다. 마지막 금문은 柬과 같은 형태다.

소전은 柬 밑에 火를 쓴 것이 와전되어, 柬에 있는 나무 목(木)의 아랫부분이 火로 바뀌면 나오는 형태다. 나중에 해서가 될 때 木의 윗부분마저 일천 천(千) 비슷하게 와전되어 柬과 거리가 더 멀어졌다.

금문에서는 火나 土가 없는 형태도 있기 때문에 원 의미는 불이나 흙 없이도 해석이 가능해야 하며, 熏에서 파생된 글자 중 향풀 훈(薰)을 고려하면 원래는 자루에 향풀을 넣어 싸맨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火가 들어오는 것은 향풀을 태워서 향을 내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熏은 금문에서는 '분홍빛'이라는 뜻으로도 가차되어 쓰이며, 이 뜻은 나중에 분홍빛 훈(纁)으로 파생되어 나간다.

熏(불길 훈, 훈액(熏液), 심훈(沈熏) 등. 어문회 1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熏+力(힘 력)=勳(공 훈): 훈장(勳章), 공훈(功勳) 등. 어문회 2급  

熏+土(흙 토)=壎(질나팔 훈): 훈(壎/塤), 훈지상화(壎篪相和) 등. 어문회 2급  

熏+火(불 화)=燻(연기치밀 훈): 훈제(燻製), 냉훈(冷燻) 등. 어문회 준특급  

熏+糸(가는실 멱)=纁(분홍빛 훈): 현훈(玄纁: 장사 지낼 때 산신에게 드리는 검은 헝겊과 붉은 헝겊) 등. 어문회 특급  

熏+艸(풀 초)=薰(향풀 훈): 훈훈(薰薰), 조지훈(趙芝薰) 등. 어문회 2급  

熏+金(쇠 금)=鑂(금빛바랠 훈): 고훈(高鑂: 고종 대의 의관) 등. 어문회 특급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

이 중 勳과 壎은 공통점이 있다. 성부를 熏 대신 인원 원(員)을 써도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勳이 정자고 勛은 이체자로 취급하지만(중국에서는 勛을 간체자로 지정), 역사적으로는 勳보다도 오히려 勛이 먼저 출현했다.

왼쪽부터 勳(勛)의 금문, 설문해자 고문, 소전. 출처: 小學堂

勛의 금문에는 조개 패(貝)가 아니라 솥 정(鼎)이 보이는데, 이는 員의 원래 형태다. 나중에 鼎이 貝로 바뀐 것이 지금의 員이다.

금문에서 勳은 형성자의 짜임 외에도, 제사 때 쓰는 술잔에서 비롯해 벼슬, 작위를 뜻하는 爵에 기초를 둔 회의자의 짜임으로도 나타난다.

勳의 또 다른 금문(위)과 이를 해서화한 글자(아래). 출처: 小學堂

위의 금문에서 복잡하게 생긴 무언가가 바로 爵의 금문이다. 爵은 후대에 이것저것 덧붙는 바람에 금문보다도 현재의 해서가 더 복잡하다. 여기에 두 손을 묘사하는 받들 공(廾), 또는 높은 집 또는 문을 묘사하는 멀 경(冂)을 더한 것이 바로 이 금문 勳의 이체자들이다.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하사하거나, 높은 집 또는 문과 술잔으로 공을 치하하는 모습을 본뜬 것 같다.

더 나아가서 보면, 勳의 성부가 熏이 된 것은 아마도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것이 마치 향풀을 태워 향을 내는 것과 유사한 심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와는 대비되어, 壎은 역사적으로는 엉뚱하게도 황새 관(雚)을 성부로 쓰는 이체자 壦이 먼저 나타났고 壎은 그 다음이며 塤은 당나라 때에서야 뒤늦게 등장한다. 다만 전초고문자에서는 塤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옛날에도 塤이 쓰였을 가능성은 있다. 전초고문자에서는 壦, 塤 외에 이를 운(云)을 성부로 쓰는 土+云의 형태도 볼 수 있다. 한편 雚과 운모가 같은 으뜸 원(元)을 성부로 쓰는 坃 역시 壎의 고자(옛 글자)다.

員은 '인원 원' 외에도 '사람이름 운'이라는 훈음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員과 熏의 음은 의외로 가깝다. 이것을 감안하면 薰은 훈음이 모두 비슷한 향풀 운(芸)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을 분석해 본 결과, 형성자의 성부로서 熏, 員, 그리고 芸의 성부인 이를 운(云)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고, 실제로도 모두 글월 문(文)운에 속한다.


熏이 본디 향풀이었고 이를 태워 향을 내는 모습을 나타내는 한자였다면, 이 본 뜻을 지니고 있는 한자가 바로 薰이다. 이 한자는 현대에는 주로 사람 이름에 쓰이는 한자이지만,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인 '훈훈(薰薰)하다'가 바로 이 한자를 쓰는 단어다. 훈훈한 느낌을 주는 남녀를 가리키는 신조어인 '훈남'(薰男)과 '훈녀'(薰女)도 알고 보면 한자어인 셈이다. 한자로만 보면 '향풀 같은 남자', '향풀 같은 여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봐도 본래의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다. '훈훈하다' 자체가 향풀을 태워 나오는 향의 느낌에서 유래한 단어일 테니.


한편 《설문해자》 이래 전통적인 熏의 뜻과 유관한 한자는 연기치밀 훈(燻)인데, 순수한 형성이라기보다는 향풀을 태워 연기를 내는 모습을 고려해 熏의 뜻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어문회 준특급 한자이지만, 연기를 쬐어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인 훈제(燻製)와 관련된 용어가 전부 이 한자를 쓰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은근히 접할 수 있는 한자다.


이상 熏과 그 파생자들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熏은 전통적으로는 불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향풀을 싸맨 자루, 또는 그것을 불에 태우는 모습을 그린 상형자로 보인다.  

熏에서 勳(공 훈)·壎(질나팔 훈)·燻(연기치밀 훈)·纁(분홍빛 훈)·薰(향풀 훈)·鑂(금빛바랠 훈)이 파생되었다.  

熏은 형성자의 성부로는 사람이름 운(員)·이를 운(云)과 통한다.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향풀 또는 향풀을 태우는 것과 유관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