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장구벌레가 아니라 토끼
지난 글, 둥글 원에서 파생된 글자들과 연관이 있다고 언급한 장구벌레 연(肙)의 자원과 이에서 파생된 한자를 살펴보자. 肙은 《설문해자》에서 “작은 벌레다. 고기 육(肉)의 뜻을 따왔고 에울 위(囗)의 소리를 따왔다.”라고 풀이한 이래 작은 벌레, 장구벌레를 뜻하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문헌을 통해 이 한자가 일단은 토끼 토(兔)의 변형으로, 궁극적으로는 兔가 세 번 반복된 “빠를 부”(⿱兔⿰兔兔)라는 한자의 약자로 쓰였다는 설이 나왔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자 중의 하나가 肙에서 파생된 멍에끈 현(鞙)이다. 이 한자는 전국시대 초나라 간백문자(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나 비단에 쓴 문자)에서 아래와 같이 나온다.
왼쪽의 세 문자는 가죽 혁(革) 옆에 肙이 두 번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맨 오른쪽 글자를 보면 조금 다른 걸 볼 수 있다. 囗을 대충 휘갈겨서 리본처럼 쓴 것 같았던 부분이 조금 더 복잡하게 꾸며진 모양이다.
사실 저건 초나라 간백문자의 토끼 토(兔)다.
肙의 囗처럼 보인 부분은 원래는 토끼의 머리와 큰 귀를 본뜬 것이었고, 肉처럼 보인 부분은 토끼의 몸통과 다리였다. 그래서 囗이나 肉과 조금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토끼가 두 마리가 있는 것일까? 고대 한자에서는 같은 한자를 반복해서 새로운 한자를 만들 수 있고, 그 한자가 다른 한자의 구성 요소가 되면서 간략해지기 위해 반복 횟수를 줄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예전에 다룬 엄습할 습(襲)은 본래 나는용 답(龖)이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였으나 너무 복잡해서 용 한 마리를 빼서 용 룡(龍)으로 줄인 것이다.
초나라 간백문자에서는 토끼 토를 세 번 반복한 빠를 부(⿱兔⿰兔兔)라는 한자를 음이 '완'인 한자를 나타내기 위해 쓰고 있다. 하나라 왕 걸이 민산에서 얻은 두 아씨 염(琰)과 완(琬)을 - 삼국지에 나오는 장완의 자가 공염인 것이 생각난다 - 참(朁)과 ⿱兔⿰兔兔(위 초나라 간백문자 1)로 썼고, 초나라의 대신 극완(郤宛)을 ⿱兔⿰兔兔로 불렀고, 《시경》의 “소완”(小宛)편을 小⿱兔⿰兔兔(위 초나라 간백문자 2)라고 썼다. 이 중 초나라 간백문자 2는 밑의 兔 둘은 肉 둘로 줄여서 썼다.
따라서 지금은 ⿱兔⿰兔兔를 '부'라고 읽지만, 당시에는 '완'이나 그와 음이 비슷한 '연' 등으로 읽었을 것이다.
⿱兔⿰兔兔는 《설문해자》에서는 뜻은 '빠르다'이지만 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지금의 음인 '부'는 후에 나온 《옥편》에서 지금은 이 한자를 빠를 부(䞯)로 쓴다고 해설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설문해자》 이전에는 《옥편》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 글자를 운용했을 수 있다.
그래서 원래는 革 옆에 ⿱兔⿰兔兔를 다 써야 하는데, 귀찮아서 토끼를 두 마리만 그린 것이 위의 鞙의 간백문자이고, 심지어 한 마리만 남긴 것이 지금의 鞙인 셈이다.
兔는 그 자체로도 형성자의 성부가 될 수 있어서 ⿱兔⿰兔兔를 兔로 줄이면 헷갈릴 수 있는데, 어차피 ⿱兔⿰兔兔를 줄인 것이니 이왕 줄이는 거 토끼를 대충 그려서 肙으로 나타내 兔와 구분한 것 같다.
⿱兔⿰兔兔나 이를 축약한 兔, 肙 등이 '완', '연'의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인다면, 흔히 회의자로 여겨지는 한자 중에도 형성자로 재검토해야 할 한자가 있다. 바로 원통할 원(冤, 寃)이다.
《설문해자》에서는 “굴복하는 것이다. 토끼 토(兔)와 덮을 멱(冖)의 뜻을 따랐다.”라고 풀이했고, 이에 따라 토끼가 사로잡혀 원통해 하는 모습을 본뜬 회의자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兔가 ⿱兔⿰兔兔의 축약형이면, ⿱兔⿰兔兔가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가 된다. 아직 ⿱兔⿰兔兔가 들어가는 이체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冤 자체가 가장 오래된 자형이 《설문해자》 소전이라 그 전에는 ⿱兔⿰兔兔를 온전히 썼을 수도 있다. 물론 토끼 세 마리가 사로잡혔으니 원통함도 세 배가 된다.
윈도우즈 한자 입력기에서는 寃이 冤보다 순서가 앞서지만 급수 시험에서는 冤이 급수가 더 낮은데다 寃이 배정된 준특급은 정자가 아니면서 널리 쓰이는 이체자 수용소로도 쓰이고 있어 《설문해자》의 표제자인 冤을 중시하고 있다. 토끼 토도 정자인 兔는 3급, 약자인 兎는 준특급에 배정되어 있다.
冤이 성부로 들어가는 한자들 중에는 예쁠 완(婉)과 동자인 ⿰女冤, 검을 울(黦)과 동자인 ⿰黑冤이 있는데, 이 두 한자의 성부는 위에서 ⿱兔⿰兔兔가 대신했다고 나온 완연할 완(宛)이다. 冤과 宛이 형성자의 성부로 상통한다는 것은 冤이 이미 宛과 상통하는 것을 보인 ⿱兔⿰兔兔에서 비롯하는 글자라는 방증이 된다.
지금까지는 전국시대 한자를 다뤘는데, 주나라 시대 금문으로 시집가는 여자에게 주는 잉기(媵器)인 '장자말신보'(長子沫臣簠)라는 유물의 명문에서도 ⿱兔⿰兔兔가 들어가는 한자가 발견이 되었다. 바로 ⿰頁⿱兔⿰兔兔이다. 다만 사람 이름으로 쓰인 한자라 뜻도 음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게 문제. 위의 추측이 맞다면, 음은 대략 '완'이나 '연'과 비슷했을 것이다.
장구벌레 연(肙, 급수 외 한자)=빠를 부(⿱兔⿰兔兔, 급수 외 한자)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兔⿰兔兔+冖(덮을 멱)=冤(원통할 원): 원통(冤痛), 설원(雪冤) 등. 어문회 1급
肙+女(계집 녀)=娟(예쁠 연): 연수(娟秀: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선연(嬋娟: 얼굴이 곱고 아름답다) 등. 어문회 준특급
⿱兔⿰兔兔+宀(집 면)=寃(원통할 원): 어문회 준특급
肙+心(마음 심)=悁(성낼 연|조급할 견): 연우(悁憂: 화나면서 걱정하다), 연읍(悁悒: 화나면서 걱정하다) 등. 어문회 특급
肙+手(손 수)=捐(버릴 연): 연조(捐助), 의연금(義捐金) 등. 어문회 1급
肙+水(물 수)=涓(졸졸흐를 연): 연로(涓露: 이슬 정도의 적은 물), 연연(涓涓) 등. 어문회 준특급
肙+犬(개 견)=狷(고집스러울 견): 견광(狷狂: 과장이 심하거나 극단에 치우친 행동을 하는 사람) 등. 어문회 특급
肙+玉(구슬 옥)=琄(옥모양 현): 인명용 한자
肙+目(눈 목)=睊(흘겨볼 견): 견목(睊目: 눈가가 붉게 젖고 가려우며 눈물이 나오는 증상) 등. 어문회 특급
肙+糸(가는실 멱)=絹(비단 견): 견직물(絹織物), 인견(人絹) 등. 어문회 3급
肙+虫(벌레 훼)=蜎(벌레꿈틀거릴 연): 연현(蜎蠉: 장구벌레) 등. 어문회 특급
肙+金(쇠 금)=鋗(노구솥 현): 이현(李鋗: 순조 대의 인물) 등. 인명용 한자
肙+革(가죽 혁)=鞙(멍에끈 현): 현현(鞙鞙: 길게 늘어진 모습) 등. 어문회 특급
肙+馬(말 마)=駽(검푸른말 현): 현(駽: 돗총이, 검푸른 말) 등. 어문회 특급
肙+鳥(새 조)=鵑(두견새 견): 두견(杜鵑) 등. 어문회 준특급
絹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絹+网(그물 망)=羂(올무 견): 견삭(羂索: 짐승을 잡는 밧줄, 또는 불교에서 중생 구제를 상징하는 여러 색실로 꼰 줄),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 견삭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관음) 등. 인명용 한자
⿱兔⿰兔兔·肙에서 파생된 한자들.
토끼 세 마리에서 비롯한 글자라서 그런지 ⿱兔⿰兔兔이나 이를 축약한 肙이 들어가는 한자들에서는 토끼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冤(원통할 원)은 冖(덮을 멱)이 뜻을 나타내고 ⿱兔⿰兔兔의 축약형인 兔(토끼 토)가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 세 마리가 함정에 빠져 원통해 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娟(예쁠 연)은 女(계집 녀)가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처럼 예쁜 여자를 가리킨다.
悁(성낼 연|조급할 견)은 心(마음 심)이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의 조급하고 성내는 마음을 뜻한다.
捐(버릴 연)은 手(손 수)가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가 입에 맞지 않는 풀을 버리듯 버리는 것을 뜻한다.
涓(졸졸흐를 연)은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 세 마리가 뛰어다니듯 물이 졸졸 흘러가는 모습을 뜻한다.
狷(고집스러울 견)은 犬(개 견)이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개가 토끼처럼 고집스러운 모습을 뜻한다.
睊(흘겨볼 견)은 目(눈 목)이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 세 마리가 주변을 경계하며 흘겨보는 모습을 뜻한다.
鋗(노구솥 현)은 金(쇠 금)이 뜻을 나타내고 肙이 소리를 나타내며, 토끼처럼 작은 솥인 노구솥을 뜻한다.
그러면 ⿱兔⿰兔兔의 음이 '부'라는 《옥편》의 설명은 어떻게 된 것일까? 감히 주장컨대 옥편에서 착오를 일으킨 것 같은 정황을 발견했다.
女와 ⿱兔⿰兔兔가 다 들어가는 한자로, 《설문해자》에 나오는 '쌍둥이 낳을/번식할 반/부'(嬎)라는 한자가 있다. 嬎와 그 이체자들은 다음과 같다.
《설문해자》의 1을 기준으로 하면, 이 글자는 면할 면(免)을 쓰는 것이 옳고 토끼 토(兔)를 쓰는 것은 잘못 쓴 것이다. 이 글자가 낳을 만(娩)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토끼 토를 쓴 이체자가 바로 2다.
그리고 3에서는 免을 세 번, 4와 5에서는 兔를 세 번 반복해 썼다. 이렇게 ⿱兔⿰兔兔이 嬎의 성부로 쓰였기 때문에 ⿱兔⿰兔兔의 소리를 '부'로 본 것 같은데, 실제로는 ⿱兔⿰兔兔이 아니라 ⿱免⿰免免인 3이 옳은 이체자일 것이다.
따라서 ⿱免⿰免免의 음이 '부'고, ⿱兔⿰兔兔의 음은 '완'이다. ⿱兔⿰兔兔을 '부'로 읽고 ⿱免⿰免免과 같은 자로 본 전통적인 자전의 해설은 두 글자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肙(장구벌레 연)은 전통적으로는 작은 벌레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토끼 토(兔)의 이체자고, 더 나아가서 ⿱兔⿰兔兔의 축약형으로 쓰였다. ⿱兔⿰兔兔는 지금의 훈음은 '빠를 부'이지만, 옛날에는 '완', '연' 등으로 읽었다.
⿱兔⿰兔兔·肙에서 冤(원통할 원)·娟(예쁠 연)·寃(원통할 원)·悁(성낼 연|조급할 견)·捐(버릴 연)·涓(졸졸흐를 연)·狷(고집스러울 견)·琄(옥모양 현)·睊(흘겨볼 견)·絹(비단 견)·蜎(벌레꿈틀거릴 연)·鋗(노구솥 현)·鞙(멍에끈 현)·駽(검푸른말 현)·鵑(두견새 견)이 파생되었으며, 絹에서 羂(올무 견)이 파생되었다.
⿱兔⿰兔兔·肙은 파생된 한자들에 토끼와 관련된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