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프롤로그 11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서 공장에 가서 일도 해보고, 몇백만 원을 내서 커피 자격증도 따고, 그것도 부족해서 별다방까지 가서 경력을 쌓아보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얘는 언제쯤 뉴질랜드 프롤로그 끝내고 뉴질랜드에 도착하나 싶을 수 있다.
놀랍게도 아직 한참 멀었다.
뉴질랜드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노빠꾸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지만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린 이유가 있다.
너무 무서웠다.
세상 씩씩하게 우물 밖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너무 무서워서 나온 방어기제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로 낯선 상황을 마주했을 때 당황한 내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데 무작정 뉴질랜드에 갈 수 없었다.
그 방어기제의 끝판왕이 필리핀 어학연수였다.
항상 제로베이스로 현지에 가서 맨땅의 헤딩으로 언어를 배워왔기 때문에 이번에 뉴질랜드에 가서도 살다 보면 영어가 늘겠지라는 현실성 없는 생각으로 내 머릿속의 꽃밭을 뛰어다니다가 바로 현실을 자각했다.
지금까지 내 모든 외국어는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현지에서 6개월~1년 정도 살다가 습득한 것이다.
덕분에 유학(?) 기간에 비해서 나는 확실히 외국어를 잘하는 편이 맞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외국어를 잘하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그 시간을 매일 눈물로 지새웠다는 이야기다.
언어를 배우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당시에 내가 그곳에서의 생활을 버티기에는 벅찼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이 PTSD처럼 훅 올라오면서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내가 뉴질랜드에 갔을 때 집도 구해야 하고, 일도 구해야 하고,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그 외 다수의 사건 사고도 해결해야 한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처리하려고 해도 스트레스인데 이 힘든 걸 외국에서 내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산 넘어서 산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국어를 배울 시기에는 어려서 머리가 말랑말랑했고 모두가 날 기다려 줬으니까 그런대로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이 먹고 외국 나가서 영어 한마디 못 하는데 누가 날 기다려줄까 싶고 그런 부정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좌절해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차마 제로베이스인 상태로 뉴질랜드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뉴질랜드 어학원을 찾아봤는데 뉴질랜드 한 달 어학원 비용이면 필리핀 기숙어학원에서 3개월을 공부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나의 적은 예산으로 선택지는 필리핀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에게 행동해야겠다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또다시 경주마 본능이 살아나서 바로 초록 창에 뜬 파워링크 광고의 유학원 열 군데 정도에 상담 문의를 하고 가장 빠르게 답장이 온 유학원과 상담 후에 바로 필리핀 어학연수 3개월 예약금을 걸었다.
이 모든 일의 진행은 단 3일 만에 결정되었다.
대충 별 고민 없고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일들을 벌리고 수습하는 거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기준점은 있다.
필리핀 어학연수를 선택한 이유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가장 오랫동안 공부할 방법이었다.
가장 연락이 빨리 온 유학원과 계약을 한 이유는 외국에서 내가 급하면 누구한테 연락하겠는가?
당연히 유학원에 해야 하는데 유학원이 답장 속도가 느리면 아주 골이 아프다. 그래서 상담하면서도 내가 필리핀에 가 있는 동안 도움을 요청할 상황에 연락드려도 되는지 그리고 빠르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서 바로 예약금을 부친 거다.
그리고 이건 온전히 나의 의견이지만
외국어 공부에 있어서는 '요행'이 없다고 생각한다.
매일 조금씩 꾸준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스킬이 외국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정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매일 꾸준히 시간을 투자하는 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조금 덜 힘들게 새로운 언어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에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내돈내산 어학연수? 멋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