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3
괴로운 더위가 물러간 타이베이의 여름 밤. 어둠이 찾아오면 노란 돌고래 가방을 옆으로 메고 나가서 걸었다. 어제는 야시장, 오늘은 동네 수변 공원, 내일은 공관역.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그렇게 걷다 보면 조금씩 숨이 쉬어졌고 조금씩 대만의 이 긴 밤을 견뎌낼 힘이 생겼다.
낮에 중국어 공부를 하고 저녁을 먹고 쓰레기까지 버리고 나면 그야말로 자유의 시간이 찾아왔다. 저녁에도 공부를 할 순 있었지만 이미 하루종일 공부하느라 머리를 쓴 탓에 저녁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대만에 ‘살러’ 온 거지, 중국어 공부하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가끔 하메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날도 있었지만 주로 혼자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타이베이의 밤은 여전히 30도가 넘는 찜통 속이어도 낮보다는 그나마 시원했다. 날마다 오후 2~3시쯤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 덕분이었다. 걷다 보면 줄줄 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집 가서 시원하게 샤워하고 자면 됐으니까.
산책이라는 행위는 나의 오랜 생존 수단이었다. 시골에서 자라 원래 온 들판과 산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대만으로 오기 직전 마음의 병이 깊어진 후로는 매일 나가서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대만에 오면 신나게 노느라 산책과 멀어질 줄 알았건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코로나 사태가 완화되어 어학당을 다니고 알바를 하기 전까지 3개월을 방황했던 나는 이곳 대만에서도 산책이라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도 쉐하 근처에 걷기 좋은 곳들이 많았다. 복잡한 도시보다는 여백이 느껴지는 자연 속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쉐하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하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있었다. 눈으로는 강물 위로 은은히 비치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귀로는 상견니 OST를 들으며(그 와중에 중국어 공부를 놓지 못했다) 걸었다. 걷다 보면 나처럼 산책 나온 대만 사람들과 따라나온 강아지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책로를 쭉 걸어가면 징메이 야시장으로 이어졌는데 아침 시장만큼 사람이 많진 않아도 아침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소세지 가게나 옌수지(鹽酥鷄, 닭튀김) 가게 등이 있어서 종종 야식을 사 먹기도 했다.
내가 산책을 나선 이유는 건강을 위한 것도 있지만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함이 더 컸다. 대개는 그 목적을 달성하고 한결 깨끗해진 마음으로 쉐하에 돌아갔지만, 그러지 못한 날들도 더러 있었다. 하루는 언제나처럼 동네 하천 산책로를 따라 걷던 날이었는데, 야시장에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 위로 진입하는 순간 앞에서 빨간 불들이 번쩍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방차 두 대가 와 있었다. 무슨 일 있나 하고 살펴보니 높은 다리 구조물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사다리에 매달린 소방대원 한 분이 그 분과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자 나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밤만 되면 하염 없이 산책을 하던 한국에서의 어느 날, 고소공포증이 심한 내가 8차선 도로 위 육교에서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던 그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만에 가서 살아보자’라고 결심했던 그날 밤. 나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 그 누군가는 그만큼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짐짓 숙연해졌다.
‘나에게 대만은 살기 위해 도망쳐 온 피난처인데,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겠구나.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걸까? 하기야 지금 내 대만 생활도 한국이랑 똑같지. 밥 먹고 공부하고 산책하고. 오히려 더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과 가족도, 친구도 만날 수 없다는 외로움이 더해졌으니. 우울한 건 똑같이 우울하고.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라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소방차 옆을 지나쳤다. 저 분의 삶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를, 괴로워도 그래도 살아가시기를 바라면서.
매일 비슷한 동네 산책이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쯤, 나의 산책 범위는 징메이라는 동네를 벗어나 공관역(公館站)으로까지 넓어졌다. 공관역은 쉐하에서부터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주변에 대만대학교와 사범대학교가 있는 우리나라의 홍대 거리 같은 곳이었다. 타이베이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에 속하는 곳이라 그런지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문 연 가게들이 많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운 날이면 조금 멀어도 공관역까지 걸어갔다. 자연에서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날은 푸른 나무와 정겨운 벌레 소리 이상의 위로가 필요했다. 뭐, 공관역에 간다 한들 아는 사람도,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지만 도로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가게 간판의 중국어를 읽어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가게에서는 뭘 파나 슬쩍 보기도 하면서 아주 소소한 재미를 느꼈다. '코로나가 사그라 들면 나도 이들처럼 친구들과 함께 이 거리를 거닐 수 있겠지' 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산책만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식당 취식 금지가 풀리기 전까지 두 달 가까운 시간을 매일 비슷하게 보냈으니까. 산책을 해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날에는 걷다가 눈물이 나기도 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뜬 날에는 지금은 내 곁을 떠나고 없는 우리 고슴도치 까까를 떠올리며 펑펑 운 적도 있다. 그토록 좋아하는 '상견니'의 OST를 들으며 걸어도 울적함이 가시지 않아 한참 뜀박질 하고 들어간 날도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몇 달 뒤 한식당에서 주 5일 저녁 알바를 시작하게 되면서 저녁 산책을 즐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느꼈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그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순간도 지나가고 조금씩 괜찮아진다고 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혼자 무작정 걸어 다녔던 타이베이의 여름 밤. 땀으로, 눈물로 흠뻑 젖은 시간들이었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그립다.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을 보냈기에 앞으로 어떤 외로움이든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여전히 지금도 답답함과 외로움은 내 곁에 있지만 그래도 타이베이에서의 고독했던 밤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